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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개혁을 통한 교회개혁은 가능한가[복음과상황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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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9-12-01 21:28 / 조회 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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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개혁을 통한 교회개혁은 가능한가
복음과상황 [348호] 2019.10.23


1. 시작하면서

올해도 어김없이 우울한 가을을 보내고 있다. 교단마다 ‘총회’라는 이름으로 큰 대회를 치르면서 여기서 나온 논의와 결정에 대한 탄식과 논쟁으로 이 시기를 보낸다. 논란이 되어온 명성교회 세습 문제는 끓는 기름을 식히겠다고 찬물을 끼얹은 형국이고, 위기를 극복하려고 교단마다 내놓은 방안들은 배제와 혐오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타자를 베어버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결정들이 2019년에 더욱 활발하게 진행된 것을 보니 총회 구성원의 퇴보한 의식 수준을 가늠하기 어렵지 않다. 

교단마다 줄어드는 성도 수를 염려하면서도 그들이 왜 교회를 떠났는지에 대한 깊은 반성은 없고, 떠난 이들의 믿음과 인내 없음을 비판하는 모습은 이후 한국교회가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지 예측할 수 있게 한다. 여기에 교단을 대표한다는 사람들이 크기와 자본의 유혹에 굴복한 모습은 처연하기 그지없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런 결정이 총회에서 진행될 때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며 매매하는 상을 뒤엎은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찢기 위해 달려드는 짐승에게 너무 쉽게 심장을 내준 것 아닌가.

이제 우리는 더한 애통하는 기도와 처절한 외침, 그리고 끈질긴 행동으로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 이런 가운데 총회와 교회개혁의 관계를 살펴보는 일은 의미 있는 작업이 되리라 생각한다. 교회가 개혁되어가는 역사가 멈추지 않고 또 누군가에게 이어져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탐욕의 결정과 비참한 교회 현실 속에서도 다시 생명이 움트는 일이 계속되기를, 누군가의 마음이 움직여 함께 이 길에 서기를 바란다.


이 글에서 교회개혁이나 개혁가를 이야기할 때 ‘개혁주의 신학’(Reformed Theology)1을 따르는 의미로 이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가진 사람도 교회개혁에 대해 같은 마음일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번 글은 신학 담론을 기반으로 한 글이 아니라 현재 한국교회의 개혁이라는 주제와 총회의 의미를 구조적으로 분석해 나갈 것이다.

아울러 ‘순진한 개혁주의자’ 이야기도 이 글에서 다룰 주제는 아니다. 순진한 개혁주의자란 교회개혁에 대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인간 스스로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려고 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역사의 흐름을 단순하게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라는 단어로 환원하고, 그분의 결정만을 기다리는 자세를 견지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이름을 짓고 땅을 일구게 하신 의미를 곱씹어 본다면, 오늘 사회 속에서 그리고 한국교회의 아픈 현실을 마주하면서 침묵과 회피로 일관해선 안 될 것이다. 다른 의미에서는 이들은 성경의 이상을 순진하게 해석하여 행동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것은 참 중요하다. 하지만 그 완성은 미완성된 현재 속에서 흔들림 없이 지속해서 이루어가는 과정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완성된 현재를 탓하기만 하고, 더디게 진행되는 역사의 흐름을 격렬한 비판으로만 일관하는 것은 개혁의 동력을 잃게 할 위험이 있다.


교회개혁은 단순한 논리와 일회적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결과가 아니다. 교회개혁에 대한 그들의 순수성에 의문을 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개혁을 세상과 절연하는 단순한 신앙과 논리로 접근해서는 당황스러운 결과를 맞을 수밖에 없다. 또한 열정적인 행동을 고집해서 이룰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며, 행동의 열매를 수확하지 못했다고 하여 분노에 사로잡히는 일도 개혁의 역사를 이어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


근래에 ‘복잡계’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분야와 학자에 따라서 이 말이 가진 의미를 다르게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현실 세계는 너무 복잡하고 다양해서 간단한 논리나 원인-결과의 기계적인 수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라는 풀이에 동의한다. 교회개혁도 마찬가지다. 총회가 잘 개혁되고, 목사가 올바르게 목양하며, 성도가 성숙한다면, 또는 회의 방식이 민주적으로 변하고, 공동체적 인식이 있으며, 교회가 공공성을 확보하여 사회 속에서 의미 있는 일을 더욱더 잘한다면 한국교회는 개혁의 완성을 이룰 수 있을까? 물론 누군가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다. 누구든 자신이 확보한 정보와 사역이 가장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어떤 한 분야, 아니 모든 것이 변화되는 그때가 되어도 교회개혁이 얼마나 완성되었을지는 예상하기 어렵다. 우리는 너무 복잡한 세계 속에 살고 있고, 교회개혁도 너무 복잡하고 다양한 이해들이 엉켜 있다.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는 것이 지혜롭게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어리석은 일이다. 진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복잡한 것을 복잡하다고 하는 것이 옳다. 교회개혁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모습일지라도 성경의 범주 안에서 발현되는 교회개혁의 외침은 모두 중요하다. 교회개혁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이어온 역사적 과업이다. 하나의 구호와 몇 차례의 노력으로 완성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제 교회개혁이라는 주제와 교단 총회의 연결고리들을 찾아가면서, 불완전한 총회의 모습을 지적하고, 이상적인 모습을 제안하고자 한다. 총회가 완전히 거듭나는 희망이 실현된다고 해서 교회개혁이 완성될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하지만 총회가 바르게 변화하고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교회개혁이라는 거대 담론이 움직여가고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이라는 기대는 절대 헛되지 않다.

2. 교회개혁의 이해


교회개혁 살펴보기


‘개혁된 교회가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은 역사 속에 있는 교회가 변화하는 환경과 발전하는 문화에 적응하면서도 성경이 가르친 바를 기억하여 끊임없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즉, 교회개혁은 교회가 다양한 문화적 변수와 소통하면서 그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의지적 혹은 계획적으로 변화해가는 모든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먼저, 교회개혁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를 지향한다. 교회의 종말론적 모습이 곧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교회개혁은 이 목적을 향해 가면서 온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충만히 이루어지는 것으로 끝난다. 이 지향점이 흔들릴 때 교회개혁은 표류한다.


둘째, 그러므로 교회개혁은 과정적이다. 이것은 우리가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끊임없이 유혹을 받을 것이며 그 유혹에 굴복하는 역사를 남기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교회개혁을 이야기할 때는 굴복하고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진 모습에서 멈추는 교회가 아니라 불완전함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전진해가는 교회를 염두에 둔다. 교회개혁은 연속적이어야 한다. 한 번의 개혁이나 변화로 완성되지 않기에 멈추지 않아야 한다. 실패가 반복될 수 있지만 역사 가운데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셋째, 교회개혁 과정에서 오는 불완전성은 구성원과 사회적 변수들로 인해 복잡하게 연결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교회개혁이라는 주제를 단순화하고 하나의 주제로만 묶어내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포괄적인 교회개혁을 이루어갈 수 있다.


넷째, 교회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개혁의 대상이 되는 사람, 현상 유지가 최선이라고 여기는 사람, 과거의 개혁적 의지와 결과에 만족하는 사람도 교회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이들의 저항을 이겨내야 한다. 
 
교회개혁 접근하기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전략이 필요하다. 나는 여기서 스탠포드 경영대학원 교수였던 H. J. 리비트(Leavitt)의 조직개혁 논의와 병행하여 교회개혁을 설명하고 총회개혁의 의미를 찾아보려 한다.

리비트는 조직개혁의 변수를 4가지로 보는데, 이 변수들은 서로 상호 연결·의존 관계에 있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조직개혁의 변수 4가지는 과업(task), 인간(people), 기술(technology) 그리고 구조(structure)다.2 그리고 조직개혁의 방법으로는 집중 분야에 따라 구조적 접근 방법, 기술적(과정적) 접근 방법, 인간적(행태적) 접근 방법을 이야기 한다. 각 접근 방법은 모두 의미가 있으며, 강조점과 가치관에 따라 서로 보완적이다.

구조적 접근은 원칙적으로 조직의 구조적 요인들, 권한 확대와 제한, 통솔 범위 조정, 분권화 등을 통해 조직을 개혁하려는 방법이다.3 과정적 접근은 조직 내 과정 또는 일의 흐름 그리고 거기에 결부된 기술을 개선하려는 방법으로, 관리 기술 및 소통 방식 개선을 위한 전산화 등을 말한다. 행태적 접근은 인간 중심적인 방법으로, 조직의 목표에 개인의 의욕과 열정을 결합함으로써 조직을 개혁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조직개혁 이론을 교회개혁으로 가져온다면, 먼저 구조적 접근은 권위와 역할을 재설정하면서 조직을 개혁하는 것으로 총회개혁으로 연결된다. 교단 총회는 법의 제정과 실행을 관할하고 하위 구조인 노회와 개교회 그리고 성도들의 경건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많은 것을 조직적으로 정비해 갈 수 있다. 행정체제의 구조적 설계를 개선함으로써 교회개혁의 목표인 하나님 나라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총회를 개혁하여 구조를 변화시키는 방법은 교회 역사에서도 오래된 방식이다.


다음으로, 과정적 접근은 교회의 공동체적 역량을 강화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상호 관계 설정에 공을 들이며, 그 안에서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돌봄과 환대를 실현하는 것이다. 끝으로, 행태적 접근은 성도에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이로써 성도가 교회개혁의 주체가 되어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교회개혁은 교회 조직을 개혁의 의제로 삼는가? 아니면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을 중심으로 하는가? 아니면 성도 구성원들의 관계에서 촉발되는 공동체적이고 공공적인 면을 다룰 것인가에 따라 그 출발점과 과정들이 달라진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접근 방법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호 보완적이다.


역사라는 시간 위에서 교회개혁은 성경을 받침점 삼아 교회 구조, 관계, 성도라는 지렛대에 정의, 사랑, 경건이라는 힘을 가함으로써 움직여 왔다. 그리고 지금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교회개혁의 역사적 과업을 미래로 움직여 가고자 한다. 이 글은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방식인 총회개혁을 통한 교회개혁을 강조하고자 한다.

3. 오늘의 총회를 되짚어 보기


권력집단으로서의 총회

교회는 ‘역사’라는 시간과 ‘사회’라는 물리적 한계 내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제한적인 구성원들이 특정한 문화의 영향, 사회적인 경계 안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가치 실현을 위한 수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불균형 구조를 피할 수 없고 교회 안에 계층적 구조를 발생시킨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계층적이지 않다고 선언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인다. 계층적 구조는 구성원들의 갈등을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이에 다양한 갈등 상황을 통제할 기구가 요청되고 이것이 교회 안에서 ‘치리회’라는 이름으로 당회, 노회, 총회를 구성하게 된다.


김동춘 교수의 주장처럼 교단 총회는 예배와 말씀의 봉사가 주된 직무가 아니다. 교단 내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유지하면서 교단 소속 교회의 질서 유지와 교회법 준수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교회 정치 조직인 것이다.5 따라서 교단 총회는 각 교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 상황을 치리하는 것을 포함하여 교단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교회 연합을 이루어간다. 또한 교단마다 상이하지만 각 교단 헌법에 명시된 일반적 내용에 따르면, 교단에 소속된 교회와 신학교 및 산하기관을 총괄하고 노회나 연회 또는 지방회를 관할하며, 헌법을 해석하고, 선교와 사회 사업을 계획·진행하며 노회나 연회 또는 지방회에서 올라온 의안과 판결 등을 치리하는 권한을 가진다. 이것은 교단 내 갈등 상황을 처리하고 교회의 질서를 잡는 일과 관련된다. 이런 역할에는 결국 정치적 권력이 수반되고 이에 권한과 힘의 작동이 교단 총회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된다.


문제는 교회 구조에서 생겨난 총회 권력이 특정한 계층을 위해서만 사용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들은 총회의 권력 구조가 성경의 권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면서 권력이 모든 성도의 신앙을 바르고 굳게 세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성도들의 이성이 비판을 포기하도록 종용하고 체제에 굴복하도록 만든다. 또한 총회 권력을 거스르는 이들에 대해서는 정당한 논의 없이 배제와 금지를 강제하는데, 이것이 정당방위로 포장되며 제도에 충성된 사람들에게 주입시켜 배제와 금지를 옹호하도록 만든다.


특권층은 획득된 권력의 지속성을 위해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는 모든 변화와 개혁을 두려워하며, 자신들이 형성한 제도 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6 만약 그들이 변화와 개혁을 시작한다면, 그것은 자신들이 더는 버틸 수 없는 위기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돈과 크기에 물든 권력은 그것이 유지되는 한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축적된 자본의 규모가 곧 권력의 크기가 되므로 그것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없는 법도 만들고 손가락질 받는 한이 있더라도 돈과 권력에의 욕망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 결과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명성교회 불법 세습을 인정해준 총회 결정은 돈과 권력에 굴복하여 부패한 총회 권력과 총회 정치를 여과없이 드러냈다. 체제에 대한 굴복과 침묵을 강요하며, 화합과 화해로 포장된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면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낙인찍으려는 행태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대체 총회의 권위와 권력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각 교회의 성도들이 선택한 목사와 장로가 노회로 보내지고, 이 가운데서 다시 총대(총회 대의원)를 뽑아 총회로 보내진 것 아닌가. 그런데 그 결과가 너무 참담하다.

교단 총회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권력이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총회의 정치와 권력이 무조건 나쁘고 그것을 행사하는 이들을 무조건 악하다 하면, 무질서로 말미암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할 수도 있다. 교회개혁을 이루기 위해 중요한 것은 그 권력과 정치적 이해가 바르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목적과 수단이 적법한지 점검하고, 사용 과정이 투명한지 감시하며, 그 결과가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총회개혁이라는 지렛대에 성경을 받침 삼아 정의의 힘을 가해야 교회개혁이라는 거대한 돌을 역사 위에서 굴리게 된다. 하지만 총회개혁은 쉽지 않아 보이고, 교회개혁은 너무 멀기만 하다.

제도적 오만에 빠진 총회

한국교회는 크게 세 가지 정치 형태를 가진다. 감독정치, 회중정치, 장로정치다. 감독정치는 왕정의 형식을 가지며 여러 개의 교회를 돌아보고 다스리는 ‘감독’(bishop)의 권한을 인정한다. 감독직의 우월성은 신약의 사도적 권위에 근거하고 교회 내 질서를 위한 위계적 서열을 중요시한다. 다음은 회중정치로, 성도들의 권한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직분자들의 권한을 최소화하고 직접민주주의의 형태를 취한다. 성도들의 역할이 중요하고 교회에 문제가 발생하면 전체 성도들이 모여 회의하여 안건을 결정하는 방식을 따른다. 끝으로 장로정치는 성도들이 장로를 선택하고 장로들은 교회의 치리를 맡는 ‘공화정’의 형식을 띤다.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와 치리하는 장로로 구성된 ‘당회’라는 치리회가 구성되고, 이 당회는 성도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으로 교회의 많은 일을 처리한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바는, 개별 교회든 아니면 최고 치리회인 총회든 결정 권한의 중앙집중화가 일반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모든 결정에서 지도자의 의견은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이렇게 선출된 지도자들이 모인 총회에서는 밀도 높은 특권층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결정 권한이 집중화될 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주변화7(marginalization)는 막을 수 없다. 

주변화는 개별 교회와 다양한 성도들에 대해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정작 그 대상이 소외되거나 권리 제한을 받는 상황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총회에서 청년에 대한 정책이 결정될 때 청년의 목소리는 정작 들을 수 없다. 청년은 총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목사라는 특정 계층이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청년들은 주변화된다.


목사 안수가 거부된 학생의 미래를 논의하는 자리에 당사자의 변론도, 참석도 허락되지 않는 가운데 그 학생의 미래와 인생을 결정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누구를, 무엇을 위한 총회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교단 젊은 사역자의 인생을 함부로 다룰 만한 권위와 권한을 누가 부여한 것일까. 또한 사회적으로 예민한 사안들을 다루면서도 대화와 논의는 충분하지 않고, 특별위원회라는 별도 기구를 구성하여 사안에 관한 결정을 특권층이 독점하고 있다.


특히 교회 내 여성은 적어도 절반의 구성원임에도 이들은 교회 안에서 법적으로 지도자가 될 수 없을뿐더러 설령 지위가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논의 과정에서 무시되는 일이 다반사다. 인권에 대한 수많은 사안들을 집중된 권한을 가진 자들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통과시키면서도 그들(장로교단)은 자신들의 정치체제가 민주적이고 가장 우월하다고 자부한다.

특정 정치제도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제도가 저마다 한계가 있음을 얘기하려는 것이다. 일반 사회가 제도적 한계를 계속 고민하고 수정·보완해 가듯이 교회의 정치제도도 계속해서 수정되어야 한다. 일례로, 대의제라고 하는 장로정치가 성도들의 참여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단점을 보완해가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모든 민주적인 의사결정 절차는 구성원의 효과적인 참여를 전제로 해야 한다.9 다시 말해, 성도들이 교회와 교단 총회의 의제설정과 결정단계에 참여가 가능하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총회개혁으로 성도들이 총회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고 총회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할 기회가 제공된다면, 총회는 더욱 역동적으로 움직일 것이며 교회개혁은 한 걸음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패거리들의 총회

대한무역진흥공사가 세계 70개국 만 20세 이상 성인 남녀 9,939명을 대상으로 우리나라 이미지에 대해 조사한 자료(2004년 9월 2일)가 있다. 10년이 지난 자료지만, 외국인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살펴볼 수 있다. ‘한국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묻는 질문에서 한국의 ‘패거리 문화’에 가장 높은 응답이 나왔다. 한국인의 정서에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깔려 있으며, 내부 결속을 강화하는 이 정서가 다른 문화나 공동체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배타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독점적인 관계망은 내부자들의 공동체 의식을 높이는 것과 동시에 외부와의 관계에서 차별을 드러내는 관계망을 쉽게 형성하는 것이다.


이런 문화적 영향 아래에서는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여기서 ‘우리’라는 의식은 어느 순간 ‘나’라는 단어를 대체하고 개인의 의견과 권리는 ‘우리’의 목표 아래 머문다. 그리고 공동의 선한 목적으로 시작된 ‘우리’ 의식은 어느 순간 개인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울산대 철학과 권용혁 교수는 “한국 사회는 개인적 자유나 권리의 과잉으로 신음하는 사회라기보다는 공동체적 유대감과 가치들의 과잉으로 건전한 시민이 죽어가는 그러한 사회”라고 주장한다. ‘패거리’ 문화로 자리 잡은 이런 왜곡된 ‘우리 의식’은 비슷한 부류의 다른 패거리를 만나면 합리적인 대화보다는 무조건 자기 패거리가 옳다고 우긴다. 심지어 자기 패거리가 틀린 말을 해도 내부 관계를 위해 자기 패거리를 편드는 문화가 생긴다.


이런 패거리 문화가 고착된 오늘 교단 총회의 모습은 안타깝기만 하다. 각 교단 총회가 결속력을 가진다는 것을 무조건 나쁘다 할 수는 없다. 시대 속에서 교단 총회가 의미 있는 모습으로 자리 잡기까지 강한 ‘우리’ 의식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문제는 긍정의 요소이기도 한 ‘우리’ 의식이 위기에 처했음을 직감하면서도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해 ‘우리끼리’라는 단어를 마구 사용하면서 스스로 고립되는 어리석음이다. 사회 전반에 흐르는 개방과 소통, 공유의 문화를 거스르는 교회가 정작 시대의 선도 역할을 감당할 것이라고 자부하는 것은 오만에 가깝다.

패거리 문화가 총회 내에 굳어지는 방식이 돈과 정치적 힘의 논리를 따른다는 점에서 교회의 미래는 더 어두워 보인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나 정의로운 결정을 위한 고민보다 돈 많은 사람이 자기편으로 형성한 다수가 던지는 표로 중요 결정이 이루어진다. 연줄을 따라 가장 안전한 편에 서서 내 편이 아닌 적을 무찌르려고 소리치는 모습에 깊은 회의가 든다. 총회가 편을 갈라치기 한 ‘우리끼리’가 아니라 시대적 요청에 귀를 기울이고 교회개혁을 위해 함께 힘을 모으는 ‘우리’가 될 수는 없는 걸까.

칸막이와 밀실의 총회

로마가톨릭, WEA(World Evangelical Alliance 세계복음주의연맹), 퀴어 신학, 낙태죄 문제, 이슬람, 동성애 등은 교단 신학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단 총회에서 철저하게 배척해온 주제다. 왜 총회는 이와 관련된 결정들을 쉽게 내리는가? 이것은 한국교회의 역사 특히 장로교단의 눈물겨운 과거 이야기를 들여다볼 때 수긍이 가는 점이 있다. 


과거 선교사들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던 한국교회는 자연스럽게 선교사들의 국가와 교파, 교단 배경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장로교는 1912년 장로교 총회를 조직한 후 1952년에는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고신(고려파)이 분리되었고, 1953년 4월에는 기장(기독교장로회)과 예장(예수교장로회)로 나누어졌으며, 1959년에는 예장이 합동과 통합으로 나뉜다. 한 교단에서 떨어져나간 교단들은 저마다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이것이 교단이 살아남는 방식이었고, 대중들에게 자기 교단이 문제없으며 더욱 정통성이 있다는 논리를 강하게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또한 함께하는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적 자존감을 확보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분열된 교단은 상대 교단보다 더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교리와 신앙 체계가 필요했고, 이것은 다시 제도화와 조직화 과정을 거쳐 신앙과 신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를 토대로 각 교단 신학교를 통해 같은 신앙과 교리 체계를 가진 사람들을 양성했으며,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노력을 총회에서 주도해 왔다.

총회는 교단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신학적 경계를 긋고, 논의와 대화보다는 경계 안과 바깥을 구분하며, 안에서는 경계를 넘어 나가려는 시도를 감시하고 밖에서 안으로의 접근을 어렵게 함으로써 내부를 강화한다. 굳어진 교단 신학의 경계에 대해 내부에서 이의를 제기하면 순식간에 바깥으로 내몰고, 외부에서 이의를 제기하면 귀를 틀어막고 듣지 않으려 한다. 그러니 의문 제기나 이의 제기 모두 통할 리 없다.


그들이 그은 경계는 곧 총회 권력을 가진 사람들, 변화와 개혁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돈으로 자기편을 많이 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 그들은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지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경계 긋는 일에는 경계 바깥의 조직과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주려는 정치적 의도가 담기기도 한다. 작년 예장 합동 총회에서 나온 ‘복음주의 6개 단체 신학 연구’ 결정이 대표적이다.10 (합동 총회에서는 ‘신학적 연구’라고 했으나, 사실상의 ‘사상 검증’으로 보는 목소리가 높았다.) 어떤 기준으로 6개 단체를 선정한 것인지 선정 기준이나 과정이 불분명하며 그렇게 나온 연구보고서가 얼마나 논리적이고 사실적인지 의구심이 든다. 성도들의 신앙적 일상적 고민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활동으로 신뢰받아온 단체들의 신학을 연구한다는 명분으로 압박하면서 정작 성도들의 일상과 삶에는 관심 없는 교단 신학의 문제는 감추려 한 것은 아닌가. 그러면서 자신들이 세운 경계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교단 신학이라는 경계가 변화하는 사회와 지성을 담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 경계를 강화하고 굳건히 할수록 고립되는 것은 경계 바깥이 아닌 안쪽이다. 그 고립은결국 조직의 존립을 위협할 것이다.

4.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교단 총회와 관련하여 권력집단으로서의 총회, 교회 정치제도에서 드러난 주변화 문제, 돈과 정치 권력의 패거리 문화, 그리고 신학적 경계 짓기 집착 등을 짚었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면서 총회의 변화와 교회개혁을 위해 몇 가지 바람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총대라고 불리는 목사나 장로들이 총회를 자신들의 권력 수단이 아닌 봉사의 장으로 이해하고 권력 집중으로 인한 성도들의 주변화가 없도록 정의와 형제애와 협력을 이루어가기를 바란다. 교회 내 권리와 권력은 전체 공동체에 주어진 것이기에 소수가 독점해서는 안 된다.


둘째, 총회는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한다. 경제적, 물리적 약자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교회 구성원들은 지도자인 목사와 장로를 제외하면 대다수 약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지도자들이 정의로운 결정으로 교회를 이끌어갈 것이라고 신뢰하고 기대한다. 그들의 신뢰를 이용하여 특권층의 편을 들어주고 불의를 덮는 데 앞장서도록 그들을 부추겨서는 안 된다. 더욱이 오늘날 성도들은 가혹한 자본주의의 메커니즘 안에서 모두가 하루하루 빠듯하게 살아간다. 가난한 이들이 교회를 이루고 공동체를 이루어 자신들이 한 헌금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정의롭게 사용되기를 바란다.11 그런데 이것을 착복하여 소수의 부를 축적하는 데 사용해서야 되겠는가. 목사의 설교와 장로의 치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이용해 자기 배나 불리려는 사람들을 더는 그 자리에 머물도록 해서는 안 된다.


셋째, 순진한 관용주의자들로 인하여 총회개혁이 지체되어서는 안 된다. 소란과 분열, 장사치의 상을 뒤엎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순진한 관용주의적 태도로는 개혁은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정의롭지 못한 일에 침묵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침묵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일이다. 침묵함으로써 이미 부패에 동의하는 한 표를 던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총회와 교회의 개혁이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하나의 과정이라면, 공평과 정의12, 사랑과 은혜13의 나라에 대한 용기가 있어야 한다.

2019년 교단 총회를 참관하다 보니 개혁보다는 ‘초월’과 ‘가난’을 통한 혁명이 더 어울리는 시대가 되었음을 직감한다. 그만큼 밤이 깊고 어둡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때가 이를 때에 더 나은 교회의 모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지금의 세대가 아니면 어떤가. 우리의 싸움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또 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완성하실 때까지 계속 전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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