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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8/18,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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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0-08-24 10:18 / 조회 2,78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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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꾸는 꿈! 건강한교회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2010년 08월 18일 (수) 뉴스앤조이 이진오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필립 얀시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기독교 저술가다. 그가 저술한 주옥같은 많은 책 중 교회에 대해 기록한 책이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요단, 2000)이다. 그는 이 책에서 교회로 인해 겪은 아픈 기억과 실망감을 그대로, 교회를 통한 회복과 사랑을 진솔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마치 한 편의 단편 소설을 읽는 것같이 담백하지만 내용의 문제의식과 깊이는 '교회론'을 기술한 두꺼운 신학 서적보다 핵심적이고 분명하다.

사실 필립 얀시의 교회에 대한 고민과 사랑은 우리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기에 고민하며 아파하고, 고민하기에 사랑하는 교회를 기대하며 기도한다. 그러나 2008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실시한 <한국교회에 대한 대사회적 신뢰도 조사>에서 한국교회에 대한 일반인들의 신뢰도가 18.4%밖에 되지 않고(응답자 중 기독교인을 제외하면 10%도 안 됨), <시사저절>이 조사한 '직업 신뢰도 조사' 결과 33개 직업 중 '목사'가 25위에 그쳤다(신부 11위, 승려 18위)는 등 한국교회에 대한 고민은 심각한 수준이다.

이로 인해 소위 '익명화한 그리스도인'(교회와 목회자에게 실망하거나 상처를 받고 특정 교회을 섬기지 않고 떠돌아다니거나, 특정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겉돌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수천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안타까운 현상이 보편화하고 있다.

필자는 우리가 함께 꿈꾸고 있는 '건강한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이 글이 개혁교회네트워크에 속해 있는 교회 성도들이 건강한 교회에 대해 함께 고민하며 대화하는 데 초안이 되고, 이를 통해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가고, 연합함으로 교회에 대한 사랑함이 더욱 커지기를 기대한다.

어떤 교회가 건강한 교회인가?

'교회'를 지칭하는 용어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첫째, 교회를 건물이나 제도로 이해한 용어로 'church'(처지, 미국), 'kirk'(커크, 스코틀랜드), 'kirche'(키르케, 독일) 등이다. 이는 '주께 속한 것'이라는 헬라어 'kyuiake'(키리아케)와 '주님의 집'이라는 'kyriakos'(키리아코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둘째, '교회'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로 이해한 용어로 'eglise'(에크리즈, 프랑스), 'eglwys'(에글뤼즈, 웨일즈), 'egregia'(에그레지아, 필리핀), 'geredja'(게레쟈, 인도네시아) 등이다. 이는 '불러내다'라는 헬라어 'ekklesia'(에클레시아)에서 유래한 것이다.

셋째, 교회를 가르치는 모임으로 이해한 용어로 '교까이'(일본), '짜회'(중국), '교회'(한국) 등으로 한자어 '敎會'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로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전문적인 종교 지도자에 의해 가르침을 받는 교육 단체로 이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완전히 다른 종교적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될 때 올바른 성경적, 신학적 이해를 갖는 것이 '교제'나 '섬김', '봉사' 등과 함께 중요한 것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으로서의 교회의 기능과 역할도 중요한 강조점일 것이다.

위에 언급한 용어들은 구약 성경에서 사용한 장소와 모임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에다'와 모임과 회중을 의미하는 '카할'을, 신약 성경에서 '에다'는 회당을 의미하는 헬라어 '시나고게'로 '카할'은 회중을 의미하는 '에클레시아'로 표기한 것에서 유래한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인들이 회당 즉, '시나고게'에서 모이는 것과 차별하여, 자신들의 모임을 '에클레시아'로 부르는 것을 더 선호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러 용어들을 종합해 볼 때 발제자는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주님께 속한 삶을 살도록 가르치고 배우며 교제하는 곳'이라고 정의하고, 이를 바탕으로 어떤 교회가 건강한 교회인가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는 바이다.

성경적 영성을 겸비한 교회

종교 개혁자들은 '건강한 교회' 혹은 '개혁적 교회'의 기준을 주로 3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올바른 말씀의 선포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적으로 가감 없이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성례 즉, 세례와 성찬의 올바른 시행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시적 표현으로 복음 전파와 올바른 가르침의 결과인 신앙 고백으로서의 세례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성령 안에서 한 몸 됨에 대한 고백으로서의 성찬의 시행을 의미한다. 셋째는 권징의 시행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이 기준으로 제시한 이 3가지는 오늘날 올바르지 않은 말씀의 선포, 세례와 성찬의 남발이나 무시, 말씀에 입각한 권징이 사라진 것들을 생각할 때 여전히 핵심적인 교회의 표지이다. 이를 올바로 시행하는 교회는 '성경적 영성을 겸비한 교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조금 더 현재적 상황에 맞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로널드 사이더는 그의 책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IVP, 2005)에서 의미 있는 조사 결과를 제시한다. 미국의 복음적 기독인, 자유주의적 기독인, 비기독인 3그룹에 대해 혼전 순결, 외도, 인종 차별, 가정 폭력, 이혼, 사회적 기부 등에 대해 어떤 차이가 있는가 조사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3그룹은 조사 결과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사이더는 이를 '그리스도인들의 추문(스캔들)'이라며 놀라워했다. 수많은 설교와 성경의 가르침을 이야기하며 세상을 변화시키자고 외치고, 소위 성경적 가르침에 벗어나는 사안에는 철저하게 폐쇄적 태도를 취하는 복음적 기독인들이 그들이 비판하는 자유주의적 기독인들은 물론 비기독인들과 삶의 모습에서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사이더는 이런 결과의 원인을 '이원론적 신앙' 때문으로 설명한다. 죄, 구원, 성령, 천국 등 다양한 신앙적 개념들에 대해 소위 영적이라는 좁은 해석으로 관계적, 사회적, 하나님나라적 해석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죄인이고 영혼 구원 받아야 할 존재이지만, 동시에 위로와 배려, 육체적 필요에 대한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 간과되어 있고, 성령은 우리에게 힘 주시고 능력 주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믿음 안에 교제하고, 불의에 대해 용기를 내도록 힘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천국은 죽어서 가야 하는 영원한 나라이면서 동시에 이 땅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이미 시작된 나라이다.

성경적 영성을 겸비한 교회는 결국 이원론적인 성경 해석을 배격하고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로 성경을 해석하고 실천하기 위해 애쓰는 그런 교회를 의미한다.

대부분의 교회는 '예배, 교육, 증거, 교제, 봉사'를 교회의 5대 기능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 노력한다. 발제자는 이 5가지 외에 '사회적 책임'(혹은 '사회 참여')라는 중요한 기능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5가지 요소 중에 사회적 책임이 녹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실은 우리끼리의 교제와 봉사, 개인 영혼 구원을 위한 증거 등으로 축소되어 있다. 성경적 영성을 겸비한 교회는 5+1, 즉 전통적으로 중요시하는 5가지 요소에 대해서도 도외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나라의 가치에 입각한 사회적 책임(지역적, 시대적)에도 최선을 다하는 교회이다.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교회

교회의 민주적 운영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제기되는 의문은 교회는 '신본주의'(하나님 중심주의)라는 것이다. 물론이다. 교회는 신본주의이며 하나님 중심주의이다. 문제는 '민주주의'를 신본주의와 상응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신본주의에 상응하는 개념은 '인본주의'이다.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는 사상의 영역이다. 사상의 영역에 있는 것은 제도(이념, 이데올로기) 등으로 구체화한다. 민주주의는 사상의 영역이 아니라 이념(제도)의 영역이다. 민주주의(소속원이 주권을 가지고 위임해 통치하는 제도)에 상응하는 제도는 왕정주의(1인이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는 제도), 과두정주의(소수의 특권층이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는 제도)라 할 수 있다.

민주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을 반대하는 자들은 비민주적으로 운영하자는 것인데, 이는 결과적으로 목사나 특정인에 의한 운영(왕정)이나, 소수의 특정인에 의한 일방적 운영(과두정)을 하자는 것과 같은 요구이다. 그러나 이는 사제주의에 반대하고 만인 제사장 정신을 주창한 종교 개혁자들의 정신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그로 인해 시작된 우리 '개신교'의 성경 해석과 교회 운영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다.

민주적으로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구성원인 성도들이 성경을 숙고하고 도출해 합의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이를 정관(또는 규약)이라고 한다. 교회 운영은 특정인에 의해 때에 따라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되고, 정관·규약에서 정한 것을 기준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물론 정관·규약은 불변하지 않으며 필요에 따라 합의하여 수정, 보완할 수 있다.

개교회가 정관·규약을 만들 때는 개신교회가 신학적, 역사적으로 중시하는 정치(운영) 원리가 포함되어야 한다. 첫째는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주권은 성도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권세를 주셨다. (롬 13:1) 하나님의 권세를 받은 성도들은 자신의 주권으로 신앙 양심에 따라 선택할 권리가 있고, 이를 위임하고 감시하고 견제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둘째는 모든 성도들은 양심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개신교의 소중한 전통은 성경의 해석의 최종적 책임이 교회나 사제(목회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 개인에게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복음적 분업이다. 교회의 일은 직분자(목사, 장로, 집사 등)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재능에 따라 직책(부장, 팀장 등)을 통해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정관·규약에는 교회 설립 목적과 비전, 신앙 고백, 의사 결정 과정, 직분의 선출 과정과 권한, 책임, 회원의 자격, 권징의 절차와 내용 등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되어 모든 교회 운영의 지침이 되어야 한다. 민주적으로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주권을 가진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책임 있는 태도와 참여가 가장 중요한다. 완벽한 제도 그 자체가 완벽한 영성과 신앙인의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교회는 성도 각 개인이 각성된 민주적 기독 시민으로 설 수 있도록 적절한 교육을 정기·비정기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이 교육에는 올바른 성경 이해와 해석을 위한 교육과 함께 정관·규약이 정한 교회의 목적과 비전, 책임과 권한, 직분, 의사 결정 과정, 권징의 내용 등도 포함되어야 한다.

재정이 투명하게 운영되는 교회

일반 사회뿐 아니라 교회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도 사람과 돈의 문제이다. 사람과 관련된 것이 권력과 명예라면 이를 움직이는 기저에 돈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교회에서 돈을 올바르게 관리하고 집행하는 일은 세속적인 일이 아니라 교회를 올바르게 세우는 영적인 일이다.

교회 재정에 있어서 잘 쓰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수입의 건전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헌금을 강요하거나, 직분을 매매하는 것을 통해 수입을 늘리는 것은 신앙생활을 미끼로 영혼을 갈취하는 것이다. 일단 지어 놓으면 해결된다는 식으로 진행되는 무리한 예배당 및 부속 건물 건축에 따른 헌금의 '강요'는 바람직하지 않다. 이는 정당하게 숙고하여 실시하는 건축에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에서 제시하는 헌금·연보의 원칙은 자발성이다. 아직 신앙이 미성숙하거나, 건축 등에 동의하지 않는 상황에서 강요는 신앙을 잃게 할 수 있다.

또한 교회 운영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차입 경영이다. 무리한 사역 확대, 건축 등으로 생긴 부족한 운영비를 차입해서 메우는 것은 적절치 않다. 교회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주신 일용할 양식만큼 사역하는 것이 마땅하다.

지출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회의 목적(비전)에 따른 지출이 되지 않는 것이다. 각 교회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특별한 목적이 있다. 따라서 재정 계획을 세울 때도 재정 지출 속에 교회의 목적(비전)이 우선순위로 나타나야 한다. 물론 각 교회가 교회로서의 기본적인 기능에 따른 일상적인 지출이 있지만, 개교회의 목적(비전)에 입각해 특별히 힘을 모으는 사역의 방향과 내용에 적절한 재정이 연차적으로 투입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 목적(비전)을 염두에 둔 재정 계획(원칙)을 미리 세우는 것이 중요한다. 노치준 교수가 조사한 교회 재정 지출 현황에 따르면 한국교회가 교회의 고유 목적인 '교육, 선교, 봉사 등'에 지출하는 재정과 이를 지원하기 위한 교회 자체 운영비 비율이 1:3으로 목적성을 상실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음으로 불투명한 지출의 문제이다.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연보가 목적에 따라 투명하게 사용되지 않고 누가, 어디에 사용한 줄도 모르게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드려진 헌금 중에는 과부의 두 렙돈과 같이 없는 중에 눈물로 드린 헌금도 있다.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수고해 얻은 수입 중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드린 재정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대표적인 불투명한 지출 항목은 목회자 사례비이다. 목회자에게 지급되는 재정이 사례비, 도서비, 관리비, 교육비 등 다양한 항목에 분산되어 있고, 담임목회자와 부교역자들이 구분되어 있지 않아 목회자가 실제로 얼마를 받는지 성도들이 모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

교회 재정은 교회 목적(비전)에 따른 재정 계획을 수립하고, 성경적이고 상식적인 방법으로 자발적으로 헌금·연보하도록 하며, 목회자 사례비를 포함해 불투명한 지출이 없도록 하며, 투명한 재정을 위해 홈페이지, 주보, 제직회, 총회 등을 통해 내역을 공개한다.

지역 사회와 함께하는 교회

교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주적 교회'와 '지역적 교회'를 나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우주적인 하나님으로, 전 시대와 전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를 통치하시며 이를 통해 합력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 이때 이 모든 시대와 지역의 교회를 '우주적 교회'라고 하며, 특정 시대 특정 지역에 존재하는 교회를 '지역적 교회'라고 한다. 우리 시대 모든 교회는 지역적 교회로 세우심을 받아, 우주적 교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우주적 교회의 일원 중에는 'para church'(기독교 단체·선교 단체 등)도 있다. 이는 지역 교회(rocal church)는 아니지만, 특정 계층이나 목적을 위해 교회를 돕고 협력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다.

"우주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나라를 위한 교회들이 시대와 지역과 연합하며 교회 개혁이든, 세계 선교이든 큰 비전과 목적을 향해 사역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런 모든 활동은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사역할 때 효율성이 있다. 이렇게 지역적으로 각자에게 주어진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우주적(시간적, 시대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들과 연대하는 것으로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통치하심에 동참하게 된다.

지역을 섬기는 교회의 모델이 되는 교회로 뉴욕 빈민가 아담스 모르간 지역에 있는 '세이비어교회'가 있다. 1947년에 세운 이 교회는 150여 명의 교인들로 구성된 작은 교회이다. 내적 영성과 외적 사역의 균형을 추구하며 하나님나라 가치관에 입각한 공동체 교회를 지향한다. 이 작은 교회는 놀랍게도 7개 분야에서 75가지의 연관된 사역을 통해 연간 1,000만 불의 예산을 집행하며 지역 사회를 섬기고 있다. 북카페인 '토기장이의 집', 노숙자 병원인 '그리스도의 집', '콜롬비아로드 진료소', 저소득층 사역을 하는 '만나 주거 사역', 에이즈 환자를 돌보는 '미리암의 집', '100개 도시 청소년을 위한 멘토링 사역', 마약·알콜 중독자를 위한 '사마리아인의 집', 미혼모 사역 등. 이 모든 일들이 지역 사회에서 본부 교회인 세이비어교회와 이를 통해 개척, 분립된 13개의 작은 규모의 교회들이 감당하고 있는 사역들이다.

필자는 개혁 교회(건강한 교회)들이 어디에, 어느 기간 있든지 그곳에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지역 사회를 섬기고 함께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물론 우주적 교회 일원으로서의 우주적 하나님 나라의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건강한 작은 교회들의 연합 운동을 꿈꾸며

지금까지 필자가 생각하는 건강한 교회로 성경적인 영성을 가지고 사역하는 교회,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교회, 재정이 투명한 교회, 지역 사회를 섬기는 교회를 제시하였다. 이제 발제를 정리하면서 건강한 작은교회들의 연합 운동에 대한 꿈을 나누고자 한다.

개교회를 섬기다 보면 섬기고 있는 교회와 부서, 담당하는 사역이 성장하는 일에 모든 힘을 쏟게 되고 이는 사역자로서 바람직한 자세이다. 그러나 '사제주의'와 함께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개교회주의'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에 나타나고 있는 기복주의, 성장주의, 물질 만능주의 등의 근저에 개교회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나만', '우리만'이라는 생각에 세속적인 경쟁 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지역 교회로서 지역 사회를 섬기고 함께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은 때로 우주적 교회의 일원이라는 것을 망각하게 한다. 우주적 교회의 일원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가 존재하기까지 역사적으로 교회를 만드시고 이끌어 오셨던 것들을 기억하면서, 현 시대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며, 또한 세계 교회에서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몫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들과 연합해야 한다.

특별히 작지만 건강한 교회들과의 연합을 통해 '작지만 큰 교회'를 이루고, 우리가 빠지기 쉬운 배타성을 극복하고 절제와 상호 배움을 실현할 수 있다. 작은 교회들이 건강성을 유지해 나갈 때, 때로 혼자인 것 같은 절망감과 정체감에 빠질 수 있으나 건강한 작은 교회 연합을 통해 혼자가 아닌 것을 확인하고 한국교회가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일정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교회네트워크의 사역이 소중하며 '건강한 교회'를 이루고 유지하고 확산하기 위해 회원 교회들의 활발한 개척과 분립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아울러 교회 간 연합을 통한 건강한 작은 교회들의 개척과 성장, 성숙을 지원하는 폭넓은 협력이 있기를 기대하며 기도한다.

* 위 글은 2010년 8월 14일(토)~15일(주일) 진행된 '개혁교회네트워크 연합 수련회' 에서 '개혁 교회의 영성, 성도의 교제, 민주적 교회 운영, 지역 사회 섬기기'를 주제로 한 소그룹 대화를 위해 발제되었던 글입니다.

이진오 / 개혁교회네트워크 협동총무, 예인교회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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