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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의 탄생 ③] 기독청년들의 교회개혁 이야기


강성호 작가


2015년에는 ‘한국교회사를 통해 본 평신도운동’, 2016년에는 ‘한국교회사를 통해 본 교회개혁운동’이라는 주제로 일제의 강제점령기라는 암울한 시대에 한국교회 안팎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교회개혁’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봤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인 올해에는 한국 현대사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저항하며 개혁자의 길을 걸었는지, 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저항의 길을 함께 걸어 봅시다.



글 싣는 순서
1. 예수는 어떻게 저항의 아이콘이 되었는가?
2. 교회 여성, 기생관광을 규탄하다
3. 기독청년들의 교회개혁 이야기
4. 증오에 대한 죄책 고백, 88 평화통일선언
5. 천세용의 저항적 자살과 성공회 사제들



근대의 주체로 호명되다


  한국근현대사에서 ‘기독청년’이라는 말은 황성기독교청년회(이하 YMCA)의 설립과 함께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약 6개월 전인 1903년 10월 28일에 조직된 YMCA는 교육과 계몽, 선교를 목적으로 세워진 청년운동단체였습니다. 출범 당시 YMCA는 외국 선교사들로 구성되었지만, 독립협회 계열의 인사들이 합류하면서 민족운동노선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기독청년’이라는 말은 YMCA의 회원을 지칭하는 데 불과했습니다. 이 말이 구체적인 청년 담론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건, 1910년대 중반 이후 일본 유학생 사회에서 유통된 잡지를 통해서였습니다. 그 당시 일본 유학생 사회에서는 「학지광」이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공론장이 형성되었는데, 문명 개화의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된 기독교에 대해 적지 않게 논의되었습니다. 중요한 점은 1910년대 중반이 지나자 「학지광」만으로는 기독교 논의를 담아낼 수 없게 되면서, 기독교 논의를 집중적으로 담아낼 새로운 매체가 필요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1917년 동경 YMCA의 기관지 「기독청년」이 창간되었습니다.


  「기독청년」은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시선을 여과 없이 담아내면서, 비판자와 내부자의 의견을 종합적으로 접할 수 있는 성격을 지녔습니다. 특히, 이광수와 전영택은 기독교가 민족 개혁을 위한 종교로 적합한지 논쟁했습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둘 모두 ‘기독청년’이라는 주체를 호명하면서 글을 맺었다는 점입니다. 이때 ‘기독청년’은 민족 개혁의 새로운 주체로서 호명되기 시작했습니다. 즉,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신학문을 수양한 신체 건강한 청년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청년」이라는 잡지가 만들어 낸 이상적인 청년상은 담론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도 있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기독청년’은 텍스트에서만 존재하는 주체였던 것이죠. ‘기독청년’의 실질적인 구현은 1920년대 중반 이후에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가 농촌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주체로 ‘기독청년’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이때 귀농 운동은 기독교의 농촌운동의 핵심을 이루었습니다. 장로교와 감리교가 함께 발간한 「기독신보」라는 신문은 귀농 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사설을 자주 실어 청년들의 농촌운동 참여를 독려했습니다. 1929년 2월 YMCA는 「청년」이라는 기관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촌운동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잡지 「농촌청년」을 발간하기 시작하는데요. 여기서 ‘기독청년’은 농촌계몽운동의 지도자로 정의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청년상은 사회주의 청년 담론에 압도되어 수세에 몰렸던 민족주의 청년 담론에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했습니다.


  한편, 1930년대는 금융공황(1927), 세계 대공황(1929), 농업공황(1930) 등에 직면한 일제가 경제 위기의 돌파구로 만주침략을 감행하면서 군국주의로 나아가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이때 사회주의 세력과 기독교의 관계는 신간회 해체(1931)를 계기로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기독교계가 사회주의 세력의 전투적인 무신론에 맞서고자 반공적 태도를 갖추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입니다.


1932년 9월 조선예수교연합공회는 유물사상과 계급투쟁에 의한 사회개조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는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가 반공 노선을 천명한 최초의 공식 문헌입니다.


  반공 노선을 천명한 이후 ‘기독청년’은 유물론에 맞서 싸울 주체로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특히, 농촌계몽운동에 참여한 기독청년들은 반공의 제일선을 담당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한 예로, 장로교의 농촌부 간사였던 박학전은 “기독용사들아. 새벽에 교당에 올라가 기도를 드리고 악마와 싸울 결심을 하고 복음을 들고 나가자. 나가자. 농장으로! 싸우자. 싸우자. 무신론자들로!”라고 쓰면서 기독청년의 분발과 사회주의와의 전면전을 촉구했습니다. 기독청년과 반공주의의 결합은 해방 후 서북청년회 등과 같은 우익청년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 개혁의 주체가 되었던 기독청년
 
  이처럼 ‘기독청년’은 시기에 따라 다양한 함의를 내포하면서 기독교 운동의 주체로 호명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1960년 4월 혁명을 계기로 ‘기독청년’이 교회개혁의 주체로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4월 혁명 이후에 등장한 청년은 기성세대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이었는데, 이는 기독교계의 청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 이승만 정권에 아주 협력적이었던 세력이 교회였으니 그 반발은 더 심했을 겁니다. 대표적인 예로 새문안교회의 청년들을 들 수 있습니다.


새문안교회 청년회는 4월 혁명 이후 성명을 발표하여 이승만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교회 지도자들의 사퇴를 강력하게 요구하였습니다. 이들은 3․15부정선거의 핵심에 기독교인이 있음을 비판한 뒤 1960년 5월 10일에 열릴 장로교 경기노회에서 전필순 목사와 유호준 목사가 모든 교직에서 물러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이 둘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깊이 관여한 교계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새문안교회 청년회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역공을 당했습니다. 교계 지도자들은 전필순 목사와 유호준 목사를 두둔할 뿐만 아니라 청년들을 비난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교회개혁의 담론과 제도적 수단이 뒷받침되었다면 모르겠지만, 당시 새문안교회 청년들의 목소리는 처절하게 고립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문안교회 청년들의 시도는 기성세대의 한계로 인해 좌절되었으나, 현대사의 전환기마다 불의한 권력에 아부한 교회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기독청년들에게 좋은 선례로 작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후 기독청년들의 교회개혁운동은 크게 서울의 봄(1980)과 6월 항쟁 이후(1988~1989)에 적극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먼저, 박정희 죽음 이후부터 1980년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 전까지의 정치적 과도기를 의미하는 ‘서울의 봄’에 유신정권을 지지한 교계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움직임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는 1980년 2월 6일에 열린 예수교장로회 청년겨울선교교육대회를 계기로 본격화되었습니다. 이 대회에는 1,200여 명의 청년들이 모였는데, 국가조찬기도회를 주도해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한 교계지도자들이 회개해야 한다는 입장이 선언문에 채택되었습니다.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가 1980년 4월 29일에 발표한 「한국 교계 지도자들에게 드리는 글」은 내용이 좀 더 적나라합니다. 이 성명서에 의하면, 박정희의 죽음 이후에도 독재자의 죽음을 미화한다든지 유신체제 아래에서도 신앙의 자유가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교계 지도자 안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기독청년들은 “4․19 이전의 이승만 시대에 부패했던 기독교로 되돌아가게 되지 않을까 염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교계 지도자들이 개인적 영달이나 교단제일주의를 벗어날 것과 독재체제에 맞선 한국교회의 전통을 계승․발전시켜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지배세력의 기득권을 용인하고 기회주의적 처세로 권력과 유착될 기미가 보이는 교계 인사들이 철저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개혁 요구는 1980년 5․17비상계엄의 전국확대조치로 좌절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주화 이후의 교회개혁운동


  1987년 6월 항쟁 이후 유신체제와 5공화국으로 이어진 군사정권의 독재가 종식되었습니다. 1987년을 고비로 한국사회는 민주주의로의 이행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때 종교계 안에서는 개혁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합니다. 이는 5공 청산운동이 활발했던 1988~89년에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특히, 국회가 10․27법난에 대한 진상조사에 착수하면서 종교계의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0․27법난은 1980년 10월 27일 계엄군이 불교계 정화를 명분으로 승려 및 불교 관련자를 강제로 연행하고 전국 사찰에 난입한 종교탄압사건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움직임에 맞추어 조직된 한국불교정풍회는 ‘국가원수를 위한 조찬법회’ 등을 통해 권력과 밀착되었던 승려를 추방하는 운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기독청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서울 기독청년협의회, 전국신학대학대표자협의회,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등은 국가조찬기도회 등을 통해 신군부 세력의 정당성을 선전한 교계 지도자들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의미에서 교계 신문 및 5대 일간지에 과거의 행적을 낱낱이 고백하고 사과문을 게재하며, 모든 공직에서 즉각 사퇴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여기에는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전두환을 찬양한 정진경 목사, 국가보위상임위원회에 종교계 대표로 참여한 조향록 목사, 사조직을 동원해 KNCC를 분열시키려 한 유상열 장로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그 밖에 이들은 국가조찬기도회의 폐지, 교계 내 ‘민주화추진위원회’의 구성 등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5공청산1.JPG ◀ 불의한 권력에 아부한 기성세대에게 예언자적 외침을 날린 기독청년들


  이들의 교회개혁운동은 성명서 발표에 그치지 않고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가령, 1988년 11월 23일부터 9일 동안 ‘5공 결탁 교계인사 척결 및 선교탄압 분쇄를 위한 교회대학생 철야기도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기독 청년들은 한국 기독교의 죄책 고백을 촉구하였으나 회개하는 기성세대의 모습을 조금도 찾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여기에 실망한 기독 청년들은 그 다음 단계로 ‘5공 관련 교계인사 추방을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기독청년’은 식민지 시기에 민족 개혁의 새로운 주체, 농촌계몽운동의 지도자, 유물론에 맞서 싸울 주체로 호명되었습니다. 그러다 해방 후 교회개혁의 주체로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교회가 불의한 권력에 협조할 때, 기독청년은 저항의 언어를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득권이 보여주지 못한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기독청년은 교회 봉사에 동원되는 경우가 많지만, 옛날과 다른 방식으로 교회 개혁을 고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이들을 단순한 교회 일꾼으로만 여기기보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이기훈, 『청년아 청년아 우리 청년아: 근대, 청년을 호명하다』, 돌베개,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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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일제하 청년담론 연구>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입니다. 이 책은 저자의 박사 논문을 보완해서 해방 이후까지의 청년 담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역사적 맥락과 상황에 따라 ‘청년’이 어떻게 호명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 『한국민주화운동사 2』, 돌베개, 2009


- 한국 민주화의 역사를 영역별로 정리한 책입니다. 2권은 ‘유신체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 글과 관련해서는 유신체제기 종교계의 민주화운동이 나오기 때문에 제3부 제1장 ‘종교계의 민주화운동’을 추천합니다.



* 본 글은 66호 소식지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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