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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통곡하자, 돈에 찌든 한국교회를 위하여

기사승인 [316호] 2017.02.23  15:52:02



들어가며
지난 호에 실린 김근수 선생의 글을 감동 깊게 읽었다. 마음에 잘 간직해 절대로 잊지 않고 싶은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오늘의 가톨릭교회의 참모습을 더 잘 알아감으로써 오해를 푸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아, 우리가 사실은 주 안에서 한 가족이구나, 깨닫고 부둥켜안는 기쁨이라고나 할까?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를 해도 김근수 선생이 하면 어찌나 명쾌 통쾌한지! 내 속이 다 후련~해진다. 내가 섬기고 있는 새맘교회 주일 점심 애찬이 생각난다. 기획하는 사람 없이 각자가 힘닿는 대로 음식을 가져오다 보니, 때론 반찬 종류가 겹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같은 김치, 같은 콩나물무침, 같은 두부 요리라도 그중 하나만 먹지 않고 두루 먹는다.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어도 손맛에 따라 맛이 다르기 때문이다. 혹 우리 둘이 너무 비슷한 이야기를 할 때면, 독자들이 그런 기분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이번 글의 주제는 종교개혁과 21세기 한국교회 개혁이다. 지난 글에서 종교개혁의 정신이 오늘의 한국교회에서 어떻게 왜곡되었는가는 이미 살펴보았다. 이번 글에선 500년 전 종교개혁의 정신과 태도로 21세기 한국교회를 깊이 성찰하여 개혁 과제를 찾아보려고 한다. 이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단순히 기념의 해로 삼는 것이 아니라, 통렬한 자기 성찰과 개혁의 시간으로 삼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야말로 기억이 그리스도인에게 부여하는 신앙적 의미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진단하자면 오늘 한국교회 대다수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돈에 찌들어 있다는 점이다. 바로 며칠 전에도 내 귀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이야기를 한 목사에게 전해 들었다. 그는 최근까지 수단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다 심각한 내전이 발발해 눈물을 머금고 어쩔 수 없이 귀국한 분이다. 그가 어떤 교회의 ‘목사 청빙’에 응하여 절차가 거의 다 마무리가 되어가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그 교회 담임목사가 자기를 부르더니 개인적으로 1억 원을 요구하더라는 것이다. 교회가 그 목사에게 줄 은퇴 자금을 충분히 준비했다는 데도 말이다. 하도 놀라 자신이 알던 한 원로목사에게 하소연했다가  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너무 놀라거나 이상하게 생각지 마세요.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그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할 때, 상당한 액수의 돈을 투자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이런 상황이 정말 지극히 예외적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런 예를 통해 우리는 지금 한국교회가 얼마나 돈에 찌들어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예수님이 일찍이 경고하신 바
이런 상황이 무척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럼에도 사실 깜짝 놀랄 일만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2천여 년 전에 그런 상황을 내다보시고 경고하신 바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맘몬, 즉 돈의 신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니 꿈도 꾸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으셨던가.(마 6:24) 돈의 신이 인간의 타락과 함께 갈수록 더 강력한 힘을 세상에서 발휘할 것도 내다보신 것이다.

사실 500년 전 루터의 눈에 비친 교회도 돈에 찌든 교회에 다름 아니었다. 소위 면죄부란 것도 돈에 대한 욕망과 처음부터 깊이 연루된 것은 아니었을 터이다. 원래는 교회가 진실하게 고해성사를 한 그리스도인에게 부과한 벌을 완화해주기 위한 자비로운 조처였다. 그러나 교회가 돈의 신에 휘둘리면서 면죄부를 부의 축적 수단으로 삼아버린 것이다. 교회의 가장 무서운 적은 돈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새삼 증명된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도 마찬가지다. 한국교회의 다양한 부패 현상들을 파고들다 보면, 그 가장 깊은 곳엔 돈의 신이 최고의 권력자로 보좌에 앉아 있는 흉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가 한국교회에 만연한 기복신앙이다. 나는 오늘의 기복신앙이 약속하는 부의 축복이 중세교회의 면죄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인 기복신앙 논리의 예를 들어보자. ‘십일조(돈)를 교회에 바쳐라. 그러면 하나님이 쌓을 곳이 없도록 부의 복을 부어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 부로 가난한 이웃을 도와줄 수 있게 된다.’ 면죄부 논리와 너무나 유사하지 않은가? 돈을 교회에 바치면 하나님이 베푸시는 특혜를 자신이 누릴 뿐 아니라, 그 특혜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미치게 할 수 있다는 거다.

얼핏 보면 이웃 사랑이 면죄부나 기복신앙의 동기인 것처럼 보인다. 특히 기복신앙의 경우, 출세에 성공한 사람 중엔 실제로 주머니를 열어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복신앙이 탐욕적인 신앙이 아니라며 안심하고 수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연막 장치이다. 자신에게 출세의 길을 열어준 정치경제적 제도, 즉 적나라한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에게 도무지 사회적 상승의 길을 열어주지 않는 불의한 경제다. 말하자면 그런 사회에서 성공했다는 건 그런 사람들을 밟고 일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런 사실은 외면하고 성공한 다음에 자신의 부를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준다면 그것이 정말 진정한 이웃 사랑일까? 물론 아니다. 그건 마치 워런 버핏의 아들인 피터 버핏이 정확히 꼬집은 것처럼 왼손으로 실컷 떼려 놓곤, 그 상처를 오른손으로 어루만져 주겠다는 것과 별다를 바 없는 행위일 뿐이다. 한국의 대표적 기독교 기업으로 교계에서 오랫동안 칭송받아온 이랜드그룹이 세상에서 빗발치는 비난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업 이윤으로 아무리 교회와 사회에 경제적 기여를 한들, 그 기업 이윤의 상당 부분이 노동자들 특히 알바노동자를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착취한 것이니, 어찌 세상으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기복신앙을 교인들에게 선전하는 교계 지도자들은 그런 점을 보지 못하게 하거나, 경제학적으로 도무지 입증이 되지 않은 소위 낙수효과 이론, 즉 부자를 더 부자 되게 만들어주면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 부가 자연스럽게 흘러넘친다는 이론에 기대어 그런 상황을 정당화하곤 한다. 그래서 교인들로 하여금 마음 놓고 성공을 추구하게 한다. 그 본심은 분명하다. 기복신앙을 교인들이 잘 받아들이면 성공을 위해 힘껏 노력할 것이고, 가난한 사람이나 성공한 사람이나 헌금을 많이 해서 교회가 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복신앙의 중심엔 돈에 대한 탐욕이 도사리고 있다. 교회가 돈을 밝힌 것이다. 돈이 중세교회에선 면죄에 관한 신학적 왜곡을 낳았듯, 오늘 한국교회에선 복에 대한 신학적 왜곡을 만들어낸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과 돈의 신을 동시에 섬기려다 보니 빚어진 결과다.
돈의 신은 실로 무서운 존재다. 돈의 신은 시공을 초월해 하나님에 대항하는 경쟁신으로 막강한 힘을 행사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돈은 마침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무소불위의 힘을 거머쥐게 되었다. 확고부동한 절대자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18년 전 허경회의 일갈은 지금도 유효하다.

신은 죽었다. 그러나 돈의 신, 맘몬은 예외다. 우리들 현대인에게 그는 유일하게 현재(懸在)하는 신이다. 

한국교회는 마땅히 다윗이 골리앗에 맞서듯 돈의 신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야 했다. 하지만 돈의 신에게 먼저 허를 찔리고 말았다. 돈의 신이 경건한 옷을 잘 차려입은 친구요 우군으로 교회 안에 깊숙이 잠입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통로가 바로 17세기 영국 상인계급의 청교도 신앙이었다. 그들은 근면하고 성실하게 경제활동을 지속함으로써 부를 축적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예정한 자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신앙이 갈수록 더 천박해져 결국 노골적인 기복신앙으로까지 변질된 것이다. 기복신앙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 역시 성경적 용어들로 다양하게 묘사되지만, 실상은 돈의 신에 다름 아니다. 교회는 돈의 신이 숨겨 놓은 덫에 꼼짝없이 걸린 셈이다. 결국 교회는 돈에 찌들대로 찌들어 망가질 수밖에 없게 됐다.

어떻게 하면 한국교회가, 비록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기어이 그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칠 수 있을까? 근본적으론 하늘로부터 성령이 바람처럼 불처럼 한국교회에 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역사가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고 일어나는 건 아니다. 조금이라도 깨어 있는 사람들이 돈에 찌든 교회의 실상을 명확히 직시하는 데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실상이란 사탄으로 전락한 교회의 모습이다.



사탄으로 전락한 교회
독자 중엔 아무리 교회가 돈에 찌들었다 한들 너무 심한 표현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분들이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사탄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달으면 내가 심한 말을 하는 게 아니란 걸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탄을 보자마자 즉각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흉악한 모습을 취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성경에 사탄이 뱀 혹은 용으로(창 3:1; 계 12:3), 그 심복들은 뿔 달린 짐승으로(계 13:1, 11)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런 선입관을 갖고 보면 한국교회 안에서 사탄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뱀은 간교함을, 용이나 짐승은 강한 힘을 상징하는 것이지, 흉악한 몰골을 뜻하는 게 아니다. 사탄은 경건한 모양을 취하는 간교한 변장술에 능하기 때문에 강한 힘을 발휘하는 무서운 존재다. 이는 왜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느닷없이 사탄으로 규정되었는가를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사탄, 고난과 죽임당함을 거부하는 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직접 들은 말을 상기해보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 16:23, 표준새번역)

사탄이라니! 베드로는 바로 직전에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바로 그 고백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실 뿐 아니라,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주겠다는 놀라운 약속을 주셨다. 그런데 순식간에 사탄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예수님께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 하자, 절대로 그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면 안 된다며 예수님을 꾸짖었기 때문이다.

사탄이 어떤 존재인가? ‘정통 신앙고백도 좋다. 하나님의 일에 매진하는 것도 좋다. 다만 고난과 죽임당함만큼은 피해라’ 꼬드기는 자다. 그런데 사탄의 이런 유혹에 대해서도 헷갈릴 때가 많다. 사탄이라고 해서 오로지 편하기만 한 삶을 권하지 않는다. 사탄은 금주·금연, 집안 제사 불참, 십일조, 주일성수, QT, 구역활동 참여, 개인 전도, 선교사 후원, 건축 헌금, 교회 봉사 등을 뜯어말리는 법이 없다. 아니 때로는 부추기기까지 한다. 하지만 슬쩍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고통과 죽임당함의 길만큼은 절대로 피해가라고 유혹한다. 그건 이 땅의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억압하는 불의한 세상 그리고 그 지배자들에 맞서 치열하게 저항하다 철저히 버림받아 비참하게 처형당하는 고통이다. 그걸 피해가라고 하면 그놈은 틀림없이 사탄이다. 예수님께 항의했던 베드로는 누가 보더라도 알아차릴 수 있는 사탄의 흉측한 몰골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실로 경건해 보이는 존재였지만, 사탄이었다.



사탄, 예수의 상처 자국을 피해 가는 자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면서 씨름한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였다.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진정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할례 받는 건 나름의 육체적·심리적 고통을 수반한다. 민감한 살갗을 베어내는 수술의 아픔뿐 아니라, 이방인에서 유대인으로 전환하는 불편함과 낯섦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도 상당히 경건한 존재라고 자랑스럽게 여긴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닌 바울을 괴롭혔다. (갈 6:17) 할례 자국은 자랑했지만 예수의 상처 자국은 피해 가려 했던 것이다.

‘예수의 상처 자국’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그 결의에 따라 행동하다 상처 입은 자국이다.(갈 6:14)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로마제국의 사형틀인 십자가에 못 박혀 처절한 죽음을 맞이한 뜻과 그 효력을 정확히 파악했다. 그건 바로 이 세상의 모든 차별이 무력화된 것이다. 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갈 3:28, 새번역)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종차별, 사회경제적 차별, 성적 차별이 폐지됐다고 선언한다. 이는 로마제국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불온한 선언이요 사상이요 신앙이다. 만일 이런 주장이 보편적으로 실현된다면 소위 ‘갑’으로서의 후견인과 ‘을’로서의 수혜자라는 권위주의적 위계질서 위에 세워진 로마제국은 더 이상 존립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은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했다. 로마제국 그리고 그에 타협한 유대교에 맞서 저항한 것이다. 그러니 그가 개척한 고린도교회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말하자면 로마제국의 민중들일 수밖에 없었다.(고전 1:26) 그 자신도 가난과 사회적 정치적 핍박으로 말미암는 온갖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고후 4:8-10; 6:4-10; 11:23-27) 그야말로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자기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 삶을 살았다.(고후 4:10) 그러니 어찌 그의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바울은 할례 자국에 만족하며 예수의 상처 자국을 피해가려는 유대주의자들을 굳이 사탄으로 지목하진 않는다. 하지만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요(갈 1:8), 십자가에 처절하게 못 박혀 처형당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떠난 자요,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끝마치려고 하는 자라고 맹렬하게 책망한다.(갈 3:1, 3) 그런 자들은 사탄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제 사탄의 정체가 분명해졌기에, 돈에 찌든 교회가 바로 사탄으로 전락한 교회란 걸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돈에 찌든 교회 = 사탄으로 전락한 교회
돈에 찌든 교회가 받드는 신앙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다양한 버전의 기복신앙이다. 기복신앙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려면 먼저 성공해서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부자가 되기 위해 애쓰는 길목에서 수없이 만나게 되는 세상의 불의한 구조와 제도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그런 구조와 제도를 직시하고 그에 일일이 저항하다간, 성공의 길은 거기서 끝나는 게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부자가 돼서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을 그 날만 생각하고, 불의한 제도와 질서에 순응하는 법을 몸에 익혀나가도록 은근히 유도한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다 고통을 겪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할 일은 없게 된다. 기복신앙에 의거해 헌신하다 보면 다양한 할례 자국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예수의 상처 자국은 결코 몸에 지닐 수 없다.

   
▲ 지난 3월 11일 명성교회(김삼환 원로목사)가 당회를 열어 새노래명성교회(김하나 목사)와 합병하기로 결의했다. 김삼환 목사의 아들 김하나 목사에게 세습을 하기 위한 단계로 추정된다. 관련 공동의회는 오는 3월 19일에 진행된다. (사진: 명성교회 홈페이지)


그러는 사이에 불편한 신앙 양심을 잠재우려는 신학적 무의식이 작동한다. 예수님의 고통이나 십자가 처형엔 ‘정치·사회적 의미’가 전혀 없으며, 오로지 각 개인의 죄를 용서하시려는 소위 ‘영적인 의미’만이 담겨 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리한 죄는 단순히 음란, 거짓, 탐욕 등 내면적 개인적 차원의 죄에 국한된다. 죄의 정치·사회적 차원은 생략된다. 죄 용서를 받은 후 죄와 싸우는 삶에서 정치·사회적 측면은 증발해버린다. 그리스도인이 불의한 지배세력에 저항하다 정치·사회적으로 고통을 겪거나 죽임을 당하는 건 신앙적 행동이 아니라 세속적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결과일 뿐이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의 이름으로 불의한 정권이나 재벌, 언론, 법조계 등에 저항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종북’이니 ‘좌빨’이니 하는 이름으로 규정해 낙인을 찍는다. 더 볼썽사나운 건 어느 날 갑자기 저항의 깃발을 들고 사회적 약자를 편드는 게 아니라, 기득권 세력을 옹호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소위 ‘구국기도회’라는 이름으로 종종 광장에서 펼쳐지는 반공·친미·친자본 대형집회를 들 수 있다. 현재의 박근혜 탄핵 정국에서도 적지 않은 교계 지도자들과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적 정치 참여라는 이름으로 부패세력을 옹호하고 있다. 그런 행동으로 사회에서 비난받을 때 자신들이 마치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처럼 주장한다면, 이는 실로 예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돈에 찌든 교회는 기복신앙 때문에 이와 같이 필연적으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임당함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상처 자국을 피해갈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것을 신학적으로 올바른 상태라고 정당화한다. 그런 교회는 사탄으로 전락한 교회임이 틀림없다. 적어도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책망한 예수님의 판단에 의하면 그렇다.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뜨겁게 외쳐본들, 경건한 외양을 갖추었다 한들 다 소용없다.



한국교회에 드러난 사탄의 본색: 탐욕, 거짓 그리고 폭력
이제 얼마나 많은 한국교회가 사탄으로 전락했는가를 더 분명하게 확인하기 위해, 요한복음 8:44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사탄의 본색을 성찰하면서 그 본색이 한국교회에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요 8:44, 공동번역)

여기서 악마는 사탄을 지칭하는 다른 단어이다. 예수님은 사탄의 세 가지 본색으로 탐욕, 폭력성, 그리고 거짓을 든다.



탐욕
예수님께서 유대교 지배 엘리트들을 ‘악마의 자식들’이라고 신랄하게 책망한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악마의 욕망을 따라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욕망 즉 탐욕이 사탄의 가장 두드러진 본색 중 하나다. 그 탐욕은 겉으론 하나님을 예배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위치에 올려놓고 싶어 하는 욕망이다.(창 3:5) 그런 욕망에 사로잡히면 온갖 신앙적 행위를 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교회 안에서 서로 영광을 취하는 일에 집착한다.(요 5:42, 44) 신앙의 깊이를 빙자해 잔치에선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고 랍비라 불리는 걸 좋아하게 된다.(마 23:6-7) 오늘 한국교회를 보라. 가장 큰 교회를 세운 탁월한 목회자다,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을 받아 가장 많은 헌금을 내는 장로라는 칭송을 받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화려한 대형교회 건축에 목을 매는 이유도 다 이런 탐욕 때문이다.



폭력
둘째, 예수님은 사탄이 처음부터 살인자였다고 규정한다. 그 본성이 폭력적이다. 하나님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면 폭력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 길을 가로막는 자를 제거하고 싶은 충동을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유대교 지배 엘리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요 7:1; 8:40, 59) 이유에 대한 근원적 설명이기도 하다. 가인은 자신의 제물은 거부당하고 아벨의 제물만 받아들여졌다는 이유 때문에, 아벨을 들에서 쳐 죽이지 않았던가?(창 4:1-8)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경건한 행동이 살인의 동기가 된 것이다. 예배에서조차 자신이 일인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안에 각종 폭력이 난무하고 있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 가지 예로 최근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국민통합위원장으로 임명된 최성규 목사를 들 수 있다. 그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대표를 역임한 인물로서, 2014년 7월 한 신문광고를 통해 “(세월호 유가족들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 희생자 가족이 아니라, 희망의 가족이 되라. 더 이상 과거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된다. 아픈 상처만 곱씹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같은 해 9월엔 다른 신문광고를 통해 “세월호 침몰로 정치가 멈추고, 경제 상황이 악화됐다”고 주장했다. 이는 세월호 유족들의 멍든 가슴에 못질을 하는 망언이었다. 그러고도 사과는커녕 변명이다. 세월호 유족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 이야기란다. 변명에 더 무서운 폭력성이 담겨 있다. 이는 세월호 유족 곁으로 다가가 그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저 높은 곳에서 욕심껏 다 누리면서 짐짓 사랑하는 척 아래로 내려다본 탓이다. 사실 그의 폭력적 발언은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지극히 약한 자와 자신을 동일시한 예수님을 향한 것이다. 세속적 탐욕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다 보면 반드시 폭력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거짓
예수님이 드러낸 사탄의 세 번째 본색은 거짓됨이다. 사탄은 진리 쪽에 섰던 적이 아예 없다. 그에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그의 본성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정녕 거짓말쟁이의 원조다. 사탄으로 전락한 신앙인들은 실상은 죄의 노예로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자유로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뻔뻔하게 우긴다.(요 8:33-34) 사탄의 자녀 노릇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스럽게 주장한다.(요 8:39)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 또는 귀신들린 존재로 규정한 것은 옳다고 선언한다.(요 8:48) 거짓 역시 탐욕과 폭력성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자신의 탐욕과 폭력성을 은폐하려면 거짓으로 진실을 감춰 자신과 타자를 속이는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거짓말이 무서운 것은 지속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거짓이 제2의 본성으로 안착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 절정을 우리는 오정현 목사의 한 기도문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3,000억 원 이상을 들여 건축한 초대형 교회 입당예배를 일주일 앞두고 멋진 기도문을 사랑의교회 소식지 〈우리〉에 실었다. 제목은 “새 예배당은 이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이다. 일단 제목부터 거짓이다. 신약성경 어디서도 예배당을 교회라고 말하는 걸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교회다. 예배당을 교회라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건, 교회 건물에 투영된 자신의 탐욕을 속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 건물을 기어이 건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자기 교회 교인들에게 이런저런 폭력을 행한 것을 정당화하고 미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기도문의 첫 문단만 보자.

예수님께서 찾으셨던 가난하고, 약하고,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자들이 주저 없이 왕래하기에 문턱이 없는 편안하고 친근한 그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마치 그곳이 처음부터 자신의 터전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

어안이 벙벙해진다. 그러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3,000여억 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그렇게 화려한 대형교회를 건축하고, 어떻게 이런 기도를 뻔뻔하게 드릴 수 있는지 나로선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는다. 정말 이 기도가 응답될 것을 스스로 믿었던 것일까? 거짓의 극치다. 이어지는 기도문에도 거짓이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그런 거짓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 목소리를 교계에서 듣기 힘들다. 대다수 한국교회 안에 탐욕과 폭력 그리고 거짓이 판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교회들은 돈에 찌들어 사탄으로 전락한 게 분명하다.



나가며
그렇다면 우린 어찌해야 하나? 한국교회를 향한 분노와 통곡의 길을 가야 한다. 시편 기자의 순서로 보면 분노가 먼저고(시 119:53) 통곡이 뒤를 잇는다.(시 119:136) 그런데 예수님의 순서로 보면 통곡이 먼저고(눅 19:41-44) 분노의 폭발이 나중이다.(눅 19:45-46) 우리는 예수님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니 예수님의 순서를 따라야 할 모양이다. 하지만 그게 너무 힘들면, 먼저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라도 분노를 폭발하는 게 낫지 않을까?

깊은 눈물은 참으로 아름답고 힘 있는 것이다. 타락한 교회를 바라보며 사랑하는 내 교회여, 부르짖으며 한없이 울고 또 울 때, 지난 글에서 경고한 바와 같이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는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폭력으로 변할 수 있는 자기 의에서 해방되어 겸손과 진실한 사랑으로 저항과 개혁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쉽게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뒤돌아서지 않을 수 있다. 길이 끝난 것처럼 보이면 스스로 길이 되리라 결심할 수 있다. 하여 김수영의 시에 묘사되는 〈폭포〉처럼 살 수 있으리라!

폭포는 곧은 절벽(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向)하여 떨어진다는 의미(意味)도 없이 계절(季節)과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고매(高邁)한 정신(精神)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瀑布)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사악한 자들의 집단으로 전락한 교회를 향해 특히 교계 지배자들을 향해 맹렬히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근데 쉽지 않다. 한국교회의 타락한 지배자들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마음껏 휘두르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에게서 정당한 분노를 앗아간 지 오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얼마나 자주 강단에서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더러운 저주와 분노의 목소리를 뿜어내는가?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입술에서 거룩한 분노를 거세하기 위함이다. 그런가 하면 저항 없는 순응과 인내가 마치 그리스도인의 미덕인 양 가르쳐 왔다. 이젠 그 억압되고 길든 마음과 언어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안식일 체제를 이용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짓밟고 권력을 강화한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분노를 본받아야 한다. 성전을 강도의 은밀한 안식처로 전락시킨 유대교 지배세력을 향해 분노를 폭발한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해야 한다.

돈에 찌들어 사탄으로 전락한 한국교회를 위해 함께 통곡하자, 그리고 함께 분노하자. 그것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 이 글은 <복음과상황> 2017년 3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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