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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혁단상] 한국정치, 크리스천, 기독교정당


고세훈 전문위원(고려대학교 공공행정학부 교수)


영국 현대사에서 유례없는 감정싸움의 양상을 보였던 브렉시트 소동도 일단락되었다. 잔류 편에 섰던 캐머런 수상이 물러나자, 예상을 깨고, 탈퇴캠페인의 선봉에 섰던 정치인들이 모두 당권경쟁을 지레 포기하거나 중도 탈락했고, 잔류파에 속했던 T. 메이 전 내무장관이 새 수상이 되었다. 브렉시트라는 수퍼바이러스는 수많은 사람들을 열광시키고는, 마침내 그 환호의 주역들에게 정치적 치명타를 안겨 준 셈이다. 실제로 레퍼렌덤이 끝나고 운동이 현실로 되면서 탈퇴진영을 달궜던 반이주민과 주권 회복의 구호는 브렉시트가 몰고 올 경제적 파장에 대한 불확실성과 두려움 앞에서 하루아침에 모호하고 무력한 대안이 되었다. 오히려 탈퇴를 선동했던 주역들이 일제히 몸을 사리며 볼멘 소리를 한다거나, 메이 수상이 탈퇴 절차를 규정한 리스본조약 50조를 차마 발동시키지 못했던 저간의 사정이 이러한 맥락과 무관치 않다. 이주민과 주권문제는 실은, 애초부터 그리고 투표 후에는 더욱 명료하게, 경제문제였던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갈등은 불가피하다. 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갈등이 없는 나라는 없거니와, 선진국이란 ‘이미 있는 갈등들’을 평화적으로 조정하고 타협해 낸 국가들일 것이다. (갈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때 전체주의국가가 탄생한다.) 이런 갈등 가운데 나머지 것들을 무력화하거나 배후에서 규정하는,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갈등이 빈부의 갈등 혹은 계급갈등으로 불리는 사회경제적 차원의 갈등이다. 물질의 문제는 신구약 전체가 가장 강도 높고 가장 빈번하게 경고하는 죄의 속성/경향과 맞물리며, 예수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하리라”고 말한 대목 또한 거기에 연결된다. 오바마는 대통령취임 일성으로 “흑백문제는 계급문제”라고 규정했고, 엊그제 교황 프란시스는 IS에 의한 프랑스 성당테러를 두고 “이것은 전쟁이되, 신앙전쟁이 아니라 돈과 권력의 전쟁”이라고 단언했다. 미국의 인종문제, 북아일랜드 종교내전, 스페인의 카탈로니아, 바스크의 분리주의운동, 이태리의 남북문제 등도 그 배면에는 경제적 차별, 물질적 불안 내지 이해관계의 충돌이 일관되게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정치의 기본 책무가 갈등들이 거리에서 폭력적으로 분출되는 것을 막고 그것들을 평화적으로 수렴하여 조절해 내는 데 있다면, 갈등의 가장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요인인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완화하고 제어하는 일이야말로 정치의 일차적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말하자면, 정치의 본령, 정치의 존재 이유는 “사회경제적 약자를 편드는 데” 있는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시장에서 밀려난 약자들의 문제는 날로 심각해지는 데 반해, 정치는 일상적으로 폄하되고 조소의 대상이 되어 간다는 점이다. 시장적 ‘자유’, 사유재산의 신성성을 금과옥조로 붙들고 탈규제, 민영화, 긴축을 대안으로 내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진행된 지 어언 한 세대, 그간 계급, 계층 간 불평등문제는 경제체제를 가로질러 줄곧 심화되어 왔다. 국가와 노동의 견제를 받던 자본이 이제 국경을 넘나들며 자유를 구가할수록, 발이 묶인 노동은 자본이 일방적으로 부과하는 유연화전략에 매여야 하고, 그에 따라 저임노동과 비정규직 양산 등 불안정한 고용 상황은 증폭될 수밖에 없다. 적자생존을 당연시하는 자연(‘자유’)세계의 평화란 실은 약육강식의 흉포한(“red in tooth and claw”) 살육전 위에서 형성된 질서인 바, 그때 적자(適者)란 강자를 지칭할 뿐 살아남은 자의 도덕성과는 전혀 무관한 개념이다.


본래 불평등은 위와 아래를 전제한 관계적 개념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권력적 속성을 지닌다. 따라서 방치될수록 진영 간 권력자원의 편차는 커지기 마련이거니와 그 효과는 누적적이어서, 가령 소득의 불평등은 소비 뿐 아니라 의료, 건강, 교육, 정치적 영향력 등 다양한 영역을 경유하여 불평등을 재차 심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한다. 오늘날 한국의 불평등 상황은 지니계수, 5분위, 10분위 어느 기준을 대더라도 특히 심각해서, 지금 추세라면 한국은 2020년에는 OECD 34개국 가운데 가장 높은 불평등지수를 보일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복지 의지는 말할 수 없이 취약하다. 예컨대 한국에서 조세의 빈곤율개선효과와 정부이전지출의 불평등개선효과는 각각 OECD 평균의 1/4 수준에 머물고, 한국의 국민총생산 대비 복지 지출 수준은 OECD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최하위에 가까우며 OECD 비가입국인 중국에 근사하다. 공공부문의 인적 규모 또한 보잘것없어서 한국의 인구 1천 명당 공무원 수는 OECD 평균의 1/3에도 미달하는 최저 수준이고, 보건사회복지에 종사하는 공무원 수의 비율도 OECD에 가입한 선진국 15개국 평균의 6%에 불과하다. 선진국이라면 유권자의 대종을 차지할 복지수혜인구와 복지업무관련 공무원 수가 모두 취약하니, 복지공약이 눈앞에서 물거품이 돼도 이렇다 할 정치적 반향이 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한국사회의 민간복지전통이 강고한 것도 아니다. 한국사람은 공동체의식이 강하고 정이 많아 동정심이 많다는 인식은 실은 현실과는 아주 동떨어진 허상에 불과하다. 가령 선진국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복지국가로 분류되지 않는 미국은 취약한 국가복지를 민간영역이 보충해 주거니와, 연 소득 10만 달러 미만 가구의 65%가 정례적으로 기부에 동참하는 민간자선의 총규모는 2006년 국내총생산의 1.67%에 달할 정도였다. 한국은 극히 일부 사람들에 의해 그것도 비정례적으로 자선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통계마저 부실한 형편이지만, 대략 0.05%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는 미국의 1/33, 영국의 1/15, 싱가포르의 1/6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시장탈락자 문제는 체제적이고 규모 또한 방대해서 복지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광범위하게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가 떠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사회의 자선전통은 시민들의 복지의식을 가늠해주고 따라서 다시 국가복지의 앞날을 전망하는 데 중요한 잣대이다.


이처럼 국가, 사회, 시장이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핑퐁하듯 서로에게 내치는 형국이니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매년 조사대상국가들 가운데 최하위 근처를 서성인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실제로 한국이라는 공동체가 급속히 해체되고 있다는 증거는 넘친다. 오늘날 한국은 이혼율, 저출산율, 비정규직 비율, 산업재해율, 노인빈곤률, 자살률, 심지어 교통사고사망률에 이르기까지 OECD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은 “일인당 국민소득수준이 2만 5천 불을 넘어서면 불평등이야말로 빈곤, 범죄, 질병 등 제 사회문제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라는 윌킨슨과 피킷의 최근 가설을 가장 극명하게 확인해 주는 사례일지 모른다.


제도적으로 빈곤과 불평등을 완화하고 교정해 낸 정도가 나라마다 현저히 다른 데서 알 수 있듯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상당 부분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정치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맥락이거니와, 가령 영국의 사회사상가인 D. 마컨드가 “복지국가는 20세기 유럽문명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취”라고 말했을 때, 그는 사회경제적 약자를 위해 정치의 역할이 얼마나 긴요한지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정치가 편만해서 무엇을 하든 직간접적으로 정치와 조우하지 않을 방도가 없는 현실을 살고 있다. 선한 정치는 고통 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고 우리가 모르고 죄 짓는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좋은 제도(법, 관행)를 마련함으로써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와 사랑의 회복을 위한 본래적 가치를 지닌다. 정치의 역할과 그 위력을 상고할수록, 이웃사랑의 책무를 띤 크리스천들에게 정치적 무관심은 그 자체가 죄악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오늘날처럼 시대적 조류가 정치적 혐오를 부추기고 반정치·반국가 담론이 기승을 부릴수록, 크리스천들의 정치적 관심은 어느 때보다도 막중하다.


“무릇 모든 선한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약1:17).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정치는 일반은총의 영역이다. 뉴욕 리디머교회의 팀 켈러 목사는, 살리에리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모차르트의 음악 대신 그의 음악을 들어야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일반은총 사역을 거역하는 일이며, 미국에서 한때 유행했던 ‘크리스천 옐로우 페이지’운동(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하는 가게를 이용하자는 취지의 운동)은 복음적 무지에서 비롯된 반성경적 탈선이라고 지적한다. 마르틴 루터가 “어리석은 기독교인보다 현명한 모슬렘이 통치하는 국가에서 사는 것이 낫다”고 말했던 것도 그 맥락은 같다. 교통위반을 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안전운행이지 십자가가 아니며, 좋은 정치를 위해서 반드시 기독교인임을 전면에 내걸어야 할 이유는 없다. 요컨대 선한 정치를 위해 크리스천의 정체성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천이 공의의 이름으로 타 종교인들과 빈번히 연대해왔고 또 그래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신정정치가 아니며, 어차피 정치/민주주의는 불완전한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차선이다. 오히려 개인이든 단체든 기독교를 정치에 개입시키는 일은 가능하면 피해야 하거니와, 교회 혹은 교계지도자가 특정 후보자, 정당, 정치진영을 공개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정치에 관여하는 일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인간의 약함과 악함이 부족해서 기독교 자체를 욕되게 하려는 것인가. 이런 점에서 교계 일각의 기독교정당 운동은 한국교회와 정치 모두에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성경은 갈수록 다양하고 복잡해지는 현실 정치의 쟁점들에 대해 이론의 여지없는 ‘기독교적’ 대안을 직접적으로 제시해 주지 않는다. 한국현대사에서 ‘크리스천’ 대통령이 다수였다지만 우리는 기독교가 그들의 정치에 무슨 기여를 했는지 도무지 가늠하지 못하며, 국회의원의 개신교도 비율이 40%를 넘었다는데, 한국정치의 품질이 이들로 인해 과연 얼마나 개선되었는지 도무지 요령부득이다. 교회에 출석하거나 신앙을 고백했다는 사실 자체는 정치적 자질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역사는 정치가 기독교를 참칭할 때, 얼마나 많은 비극을 불러왔는지 거듭해서 보여 준다. 기독교정당 구상은 인간과 정치 모두에 대해 말할 수 없이 순진한 혹은 왜곡된 발상에 터 잡고 있는 것으로서, 죄와 타락의 심각성에 대한 엄중한 자각 위에 서있는 기독교복음의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한국교회는 정치 이전에 세계종교사에서 유례없을 정도로 이미 분열되어 있거니와, 복지/반복지, 진보/보수, 노동/반노동, 친미/반미 등으로 나뉜 채, ‘기독인의 양심을 걸고’, 서로에게 삿대질하며 적대하고 있다. 내부적으로 지레 피폐해 있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수많은 정치 현안들 앞에서, 기독교정치의 깃발 아래 모여, 무지와 독선과 반목을 만방에 선전하는 형국이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물론 기독인은 정치가 명백한 악을 부추기거나, 타종교를 탄압할 때에도, 기독교의 이름을 걸고 정치에 저항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가 과거 부당한 정권을 편들거나 약자가 고통받는 현실 앞에서 침묵함으로써 세상의 지탄을 받았던 일은 한국교회사의 수치스런 오점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인은 선거권, 피선거권 행사, 특정 정치인 후보자나 정치단체 지원 등 정치활동을 할 수 있지만, 이런 일들은 건전한 민주시민의 일원으로서 행해도 충분하다. 교회가 세속의 도덕기준조차 버거워하며, 영적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그저 윤리(행위) 차원의 종교집단 정도로 인식되는 작금의 상황에선 더욱 그러하다.




∗ 글쓴이 소개: 고세훈 님은 개혁연대 2002년 창립멤버로 활동하였고, 2011년부터는 전문위원으로 교회개혁운동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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