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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를 통해 본 교회개혁운동 ②]


조선 교인은 선교사의 하인(下人)이 아닙니다


김일환 목사



2015년에는 ‘한국교회사를 통해 본 평신도운동’이라는 주제로 다섯 편이 연재되었습니다. 올해부터는 ‘한국교회사를 통해 본 교회개혁운동’이라는 주제로 다섯 편의 글이 연재되는데요. 일제의 강제점령기라는 암울한 시대에 한국교회 안팎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교회개혁’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봅니다. 선교사와 한국 기독교인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개혁하려는 시도, 교회 안에서 남녀차별 문제의 철폐와 평신도의 주체성을 확보하려는 노력, 장애인도 동등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임을 알리는 운동, 일제의 황국신민화에 굴복하여 협력한 기독교인들의 모습과 그 후의 행동 등을 담을 예정입니다. 이 글들이 현재의 한국교회사를 삶으로 쓰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개혁을 위하여 분발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글 싣는 순서
1. 예수교 자유교회를 아십니까?
2. 조선 교인은 선교사의 하인(下人)이 아닙니다.
3. 교회에서 남존여비(男尊女卑)가 웬 말인가?
4. ‘훈맹정음’과 박두성
5. 변절과 변명 사이에서 교회개혁을 생각한다.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1874-76년에 만주 봉황성 근처 고려문에서 의주 지역 상인들이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선교사인 존 로스와 존 매킨타이어를 만나고 1879년에 4명이 세례를 받은 일은 이제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사건입니다.
  이렇게 기독교인이 된 의주 상인들이 만주 지역과 의주를 중심으로 평안도와 황해도 소래까지 신앙 공동체를 세우고, 1884-85년에 미국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성경과 전도책자를 수천 권 이상 배포한 사실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초창기 한국교회사에서 당시 조선인들의 자립적이고 진취적인 신앙을 얘기할 때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러면 1884년 이후 조선에 와서 선교를 시작한 미국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선교사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조선의 기독교인들과 신앙 공동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선교사들이 처음 조선에 들어와서 이미 상당수의 기독교인들과 신앙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한 예로 황해도 소래 지역에서 전도하여 신앙 공동체를 만든 서상륜은 1886년 말에 서울로 언더우드 선교사를 찾아와서 소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당시 선교사들이 서울을 벗어나 지방 여행을 하는 일이 쉽지 않았기에 결국 1887년 1월에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 등 3명이 서울에 와서 세례를 받습니다. 이처럼 이미 만주와 평안도, 황해도 지역에 상당수의 기독교인이 있고, 그들이 세례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선교사들은 얼마나 놀랍고 기뻤겠습니까?


 당시 선교사를 포함한 외국인들이 지방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조선정부로부터 호조(護照)라는 여행 허가서를 받아서 조심스레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선교사들은 반대 의견과 위험을 감수하며 지방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이런 일에 앞장 선 선교사가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였습니다. 언더우드는 의주 지역까지 가서 압록강변에서 그 지역 기독교인들에게 세례를 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놀라움 가운데 선교사와 조선 교인들의 만남이 시작되었고 곧이어 계속해서 많은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는 과정에서 선교사들과 조선 교인들의 관계가 형성되고 구조화(構造化)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구조화된 선교사와 조선 교인들의 관계를 한마디로 간단하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는 19세기 복음주의 개신교 선교의 특징과 함께 미국 백인 중산층 출신의 선교사들이 가진 신앙적・문화적・인종적 인식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고, 또한 이제 막 서양 여러 나라에 문호를 개방한 조선의 상황과 당시 조선 사람들의 경제적・문화적・종교적인 인식과 대외 인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선교사와 조선 교인과의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관계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관계 가운데 선교사들이 조선 교인들에 대해서 가지게 된 부정적인 인식 중에는 조선 교인들을 계속해서 보호와 간섭을 받아야 하는 어린아이처럼 여기거나 늘 관리와 교육을 받아야 하는 학생처럼 여기는 태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 교인들의 신앙 수준을 미숙하게 생각하는 견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입교(入敎)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 입교 동기가 의심스러운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쌀교인’, ‘계군교인’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유 외에도 조선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며 기독교를 확장하는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있어서도 그들은 선교사와 조선 교인들과의 관계를 상하(上下)관계로 생각한 부분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선교사들이 비록 1891년에 로스-네비어스 선교 정책을 채택하면서 자력전도(Self-Propagation), 자력운영(Self-Support), 자주치리(Self-Goverment)의 원칙을 정했지만 그 후 수십 년 동안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조선 교인들을 상하관계의 구조 속에 묶어 두고 보호와 간섭, 지도와 교육의 대상으로 보았던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양쪽 관계를 악화시키고 불만이 쌓이게 만들었습니다.


  1925년에 열린 조선기독교봉역자의회(朝鮮基督敎奉役者議會)에서도 이런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이 회의는 국제선교협의회 회장 존 모트(J.R.Mott)의 내한이 계기가 되어 12월 28~29일에 열렸는데, 조선교회가 직면한 선교적 문제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듣기 위한 회의였으므로 당연히 선교사와 조선 교인과의 갈등 관계를 해소시켜 보려는 시도가 중요한 의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 교인 대표들은 선교사들에 대한 불만을 과감하게 제기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한석진 목사였는데, 마펫, 게일, 무어, 베커, 에비슨 등 수십 년 이상 조선에서 활동한 원로 선교사들을 향해 선교사들이 우월 의식을 가지고 계속해서 영도권을 행사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조선 교인들을 계속해서 아랫사람, 즉 하인(下人)으로 대하는 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한석진 목사의 이런 비판에 마펫이 항의하자 오히려 한석진 목사는 “마 목사 당신도 속히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금후에는 유해무익한 존재가 됩니다”라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한석진 목사와 마펫 선교사는 30년 이상 함께 사역한 동역자였습니다. 한석진 목사는 의주 출신으로 서상륜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교했고, 그 후 마펫을 만나서 1891년 세례를 받은 후 1893년부터 마펫과 함께 평양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한 이래 30년 넘게 초기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동고동락한 사이였습니다. 1925년 조선기독교봉역자의회에 참석했던 상당수의 조선 교인 대표들과 선교사들은 이렇게 수십 년간 동역 관계를 유지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조선 교인 대표들이 비판한 선교사들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조선의 교회를 자기가 세운 교회라고 생각하고 우월 의식을 가지고 교인들을 하인처럼 지배하려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조선 교회를 동인시(同人視)하며 형제시(兄弟視)하지 않고 야만시(野蠻視)하며 노예시(奴隸視)한다는 경고까지 나왔던 것입니다.


  이 회의는 양쪽의 관계 개선을 위한 뚜렷한 대책을 마련하지는 못했고 다만 “모든 사람에게 모든 사람이 되라는 바울의 말씀을 따라 선교사들이 보다 한국적이 되기를 바란다는 요청이 제시되었다”라고 정리하는 차원에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갈등은 수십 년 동안 쌓여 온 문제이기에 한순간에 해결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당시 번지고 있던 선교사 배척 운동과 연계되어서 이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당시 한석진 목사가 선교사들을 비판한 말 중에서 “우월 의식”과 “계속해서 영도권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라는 말은 사람 사이의 관계나 혹은 구조적 관계의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잊지 않고 고민해야 할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사 속에서 선교사와 조선 교인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개혁을 요구하는 많은 사건 속에서 이 두 가지 주제, 즉 우월 의식과 영도권(지도력) 행사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문제와 갈등이 해결되기도 하고 반대로 증폭되기도 한 사례가 많기 때문입니다.



60호 소식지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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