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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를 통해 본 평신도운동 4화]
평신도와 1890년대 기독교 애국계몽운동

 

 

김일환 목사

 

  동학농민전쟁과 갑오개혁(1894년), 청일전쟁(1894~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년),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피신사건(1896년), 대한제국 성립(1897년) 등의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던 1890년대는 한국의 근대사에서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한국의 기독교는 점차 일반 민중(common people) 속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기독교의 애국계몽운동입니다. 1890년대 말까지 세례교인과 학습교인, 입교인까지 포함한 기독교인 수가 만 명 남짓 되었지만 이들이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당시 사회에 끼친 영향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시기 기독교 애국계몽운동은 충군애국(忠君愛國)운동과 독립협회활동 등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고종과 왕세자의 생일을 맞아 연합축하행사를 추진하여 연설회와 기도회를 열었는데, 이런 행사에는 언제나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 제창을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애국가를 작사하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또한 태극기를 게양하는 일은 국가적 행사뿐만 아니라 부활절이나 성탄절 등에도 행해졌으며, 태극문양이 들어간 등이나 십자등, 십자기 등을 게양하는 것으로 애국의식을 드러내는 교회도 많이 있었습니다.
 
“성탄절에 인천 답방리교회에서 남녀 교우들이 열심히 연보한 돈이 사원 오십전인데 처음으로 십자기를 세우고 등 삼십육개를 십자로 달고 회당문 위에 태극기를 세웠으며 남녀교우 합 오십사 인이 모였는데, 전도 듣는 사람은 이백여 명이요.....남녀 교우 외 구경하는 사람들이 재미있게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9년 1월 4일자) 

 

  성탄절의 이런 풍경은 당시 많은 교회에서 행하고 있던 익숙한 풍경이었습니다. 그만큼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앙과 애국심을 함께 표현하는 데 있어서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애국계몽운동은 독립협회와 관련된 운동이었습니다. 독립협회는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정변이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이 1895년 12월에 귀국하면서 만들어진 단체입니다. 서재필은 귀국 후 정동에 있는 아펜젤러의 사택에 머물면서 선교사들과 구미 외교관, 정동파 인물 등을 접촉하는 한편 배재학당에서 세계지리학, 유럽 정치 경제, 교회사 등을 가르쳤습니다.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설립하기 전에 먼저 신문 창간을 추진하여 1896년 4월 7일에 한글로 된 『독립신문』을 창간했는데, 창간 당시 배재학당의 학생이자 상동청년회에서도 활동하던 주시경이 동참하였으며, 신문 인쇄는 아펜젤러의 도움으로 배재학당 내에 있는 감리교출판사에서 하였습니다. 『독립신문』은 창간호로 2,000부를 발행했는데, 호응이 대단하여 지방에 미처 보급하기도 전에 2~3일 만에 매진되었습니다. 이렇게 독립신문이 대단한 호응을 얻고 정상적인 궤도에 오르자, 체계적인 자주 독립운동을 위한 단체로 독립협회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독립협회는 1896년 6월 7일에 발기인 모임을 한 후, 7월 2일에 창립하였습니다. 창립 당시 독립협회는 독립문, 독립관 등 독립기념물 건축 사업을 추진하였고 그 다음에는 일반민중의 교육과 참여를 목표로 하는 토론회와 연설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그런데 독립협회 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기반을 차지하고 있던 곳이 배재학당과 정동감리교회였습니다. 서재필은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아펜젤러의 요청으로 학생운동을 지도했고, 윤치호 또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특히 윤치호가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한 일은 배재학당과 정동감리교회의 학생들과 교인들이 독립협회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윤치호는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연루되어 1885년 1월 중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는데, 상해에서 선교사들이 세운 중서서원(中西書院)에서 공부하던 중, 1887년 4월에 세례를 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남감리회의 세례교인이 되었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서 5년 동안 공부한 후, 1895년 2월에 귀국하여 학부협판으로 재직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1896년 4월에 민영환과 함께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참석을 위해 러시아로 갔다가, 1897년 2월에 귀국한 후 그 해 7월에 독립협회에 가입했습니다. 이후 그는 서재필, 이상재와 함께 독립협회의 3거두로 불릴 만큼 활발하게 활동하였습니다(윤치호의 친일협력 활동 때문에 그가 감리교 평신도 지도자로서 펼친 선교 및 교육활동, 독립협회 및 YMCA 활동 등이 모두 저평가 되거나 무시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서재필은 배재학당 학생들을 독려하여 1896년 11월 30일에 한국 최초의 학생회인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게 했는데, 협성회의 목적은 학생들에게 독립정신과 애국정신을 굳게 세워 서로 권면하고 국가에 봉사하며 배운 대로 전국 동포들을 권면하는데 있었습니다. 협성회는 이런 목적에 따라 매주 토요일 오후에 공개적인 토론회를 개최했는데, 주제는 “한글과 한문을 섞어 씀이 가한가?”, “우리나라 종교를 예수교로 함이 가한가?”, “노비를 속량함이 가한가?” 등 다양했습니다. 또한 『협성회 회보』를 주간으로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정동감리교회 엡웟청년회(Epworth League)가 1897년 10월 30일에 조직되었습니다.

 

  독립협회는 정치적인 성격의 단체였고, 협성회는 애국계몽단체였으며 엡웟청년회는 교회의 선교단체여서 지도자의 성격에 따라 그 참여도에 차이가 있었지만 이 단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정신적 기초는 기독교신앙이었습니다. 임원들 역시 동일한 인물들이 서로 겹쳐져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협성회의 임원인 양홍묵, 노병선, 유영석, 문경호 등이 엡웟청년회의 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독립협회와 협성회, 엡웟청년회가 합동하여 유기체적으로 움직여서 개최한 것이 토론회와 만민공동회였습니다.

 

  토론회는 1897년 8월 29일부터 1898년 12월 30일까지 34회에 걸쳐 열렸는데, 매회 토론자와 방청인이 수백 명씩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뤘습니다. 토론회의 주제는 신교육 진흥, 산업개발, 미신타파, 위생과 치안, 자주독립, 신문보급, 수구파 비판, 의회설립, 자유민권 등 매우 다양했습니다. 이 토론회는 지정 토론자뿐만 아니라 참석자들도 자유롭게 주제와 관련하여 자기 의사를 발표할 수 있었기에 이전에는 소외되어 있었던 일반 민중들이 공론(公論)의 장에 당당하게 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만민공동회는 토론회가 진행되던 1898년 3월 10일에 종로의 시전거리에서 처음 개최되었는데,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중대회였습니다.  제1회 만민공동회에서는 시전상인 현덕호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백목전 다락위에 차린 연단에서 이승만, 현공렴, 홍정후 등 배재학당과 경성학당의 학생들이 러시아의 침략정책을 비판하고 한국의 자주독립을 역설하는 연설을 했으며, 만민공동회에 참가한 1만 여명의 민중들은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서울에 있던 외교관들과 정부는 이와 같은 대규모의 민중대회가 개최된 것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일반민중의 저력에 놀라움을 표시했습니다. 이후에도 만민공동회는 1898년 12월까지 3차례나 더 열렸는데, 특히 1898년 10월 29일~11월 4일에 열린 관민합동 만민공동회에서는 자주독립, 군주와 대신의 협력결정, 공개재판, 재정개혁 등의 내용을 담은 헌의6조를 제시하였고, 독립협회회원이 정부에 입각하게 되었으며, 중추원을 개편하여 의회 설립을 하는 것에 합의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독립협회를 통한 애국계몽운동에는 정치적인 독립운동, 민권신장(民權伸張)운동, 입헌적 정치체제를 지향하는 의회설치운동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1890년대 기독교를 통하여 국가적 독립, 신부적(神賦的) 인권사상, 민주적 정치제도 등에 대한 의식이 일반 민중에게 전파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1919년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채택한 임시헌장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제로 한다.”고 선언한 것이 기독교적인 근거가 있음을 역사적으로 밝혀낸 학자도 있습니다. 즉 1890년대 기독교인들의 활동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앞선 시대에 기독교를 통하여 공화주의와 민주주의가 소개되어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결정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장에서 명문화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런 주장은 한국 기독교가 아전인수격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학계나 헌법학계에서도 무시하지 못하는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제기된 주장입니다.


  어쨌든 1890년대의 애국계몽운동과 독립협회 활동 가운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초기 한국기독교는 일반민중 속에 뿌리 내리면서 민족의 현실 가운데 함께 하는 기독교, 일반 민중과 함께하는 기독교가 되어가고 있었으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많은 평신도의 활약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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